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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컨 Leslie Kern

edwannabefaye 2023. 2. 15. 23:11

<1장> 엄마들의 도시

 

또한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 지역에서 내 몸이 성공적인 <재개발>의 표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이 공간이 꽤 팬찮고 안전하고 바람직한 중산층 거주지임을 뜻한디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백인과 표준적인 신체가 지배적인 공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유색인, 흑인, 트랜스젠더, 장애인, 원주민 같은 이들에게 내 몸은 위험이나 배척을 의미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그들을 보고 지배인에게 불만을 제기하거나 경찰에 신고해서 그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도시 자체가 나의 편안을 그들의 안전보다 우선시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나의 외적 특징은 대부분 바꿀 수 없지만 내 몸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모든 도시 공간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는 있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기 때문에 방금 언급한 소수 집단들의 주변화가 더 심해진다면 내가 꼭 그곳에 있을 필요가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은 특권을 가졌다고 해서 나의 성별 때문에 경험하는 공포나 배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특권은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교차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 책 전반에 결쳐 나의 편향적 관점이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숨기는지를 최대한 솔직하게 적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모든 지식에는 저만의 지리적 위치가 있다는, 즉 모든 지식은 <어딘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내가 <내부인>인 곳, 예를 들면 고향 토론토에서조차도 내 관점이 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샤를 보들레르의 글을 각광 받기 시작한 소요객flaneur이라는 인물은 도시의 <열정적인 구경꾼>이자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눈에 띄지 않고 <군중과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신사다. 철학자 겸 도시 생활 저술가인 발터 베냐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요객을 현대 도시예 필수적인 도시인상이라고 정의했으며 게오르크 지멜 같은 도시 사회학자들운 <심드렁한 태도>나 익명성 유지 능력을 이 새로운 도시인의 고유성으로 규정했다. 이 저술가들의 관점에 따르면 소요객은 당연히 늘 남자였으며 당연히 백인이자 비장애인이었다.
소요객이 여성이었을 수도 있을까? 페미니스트 도시 저술가들은 여기서 두 부류로 니뉜다. 어떤 사람들은 소요객이라는 개넘 자체가 배제적 비유라며 비판하고, 이떤 사람들은 그것을 되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소요객이라는 개념에 반발하는 사람들예 의하면 여성은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완전한 비가시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파는 여성 소요객이 늘 존재해 왔다며 버지니아 울프를 예로 든다. 1930년 수필 런던 거리 혜매기(Street Haunting;A London Adventure)에서 울프는 런던 거리를 걷는 동안 낯선 이들의 마음을 엿보는 상상을 하며 <일상을 벗어나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겨울 거리를 혜매는 것은 가장 큰 모험이다>라고 술회한다. 또 일기에도 <런던에서 홀로 걷는 것은 가장 훌륭한 휴식이다>라고 적음으로써 그녀가 밀려드는 군중 속에서 어느 정도 평안과 거리감을 발견했음을 암시한다. 지리학자 셀리 먼트는 이성애적 시선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을 벗어나 다른 여자들을 관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도시적 인물상으로 레즈비언 소요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보들레르, 베나민, 지멜 같은 남자들이 여성 소요객이라는 존재를 상상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여자를 발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엘킨은 주장한다. 당시 공공장소를 걸어가는 여자는 다른 목적으로 외출한 사람보다는 매춘부(성 노동자)로 인식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엘킨은 <만약 우리가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거리에서 보들레르를 스처 지나가는 여성 소요객을 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여성 소요객이 임신했거나 유모차를 밀고 있을 수도 있을까?

하지만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고전적 의미의 소요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되찾은 여성 소요객도 사실은 거리에서 눈에 띄지 압게 이동할 수 있는 <평범한> 몸의 소유자로 한정된다. 여성 소요객에 대해 이야기한 저술가 중 임신한 몸을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매디가 태어나자 소요객의 정신을 되찾으려 노력하기로 했다. 매디는 아기 띠만 채우면 내 품에 기대어 몇 시간씩 세상 모르고 잤다. 나는 지도를 보고 새로 문을 연 스타벅스까지 가는 길을 숙지한 후에 라테 한 잔하고 코에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먹이기, 재우기, 씻기기의 끝없는 반복가운데 이러한 휴식은 한 조각 자유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낳기 전에 살았던 도시 젊은이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날 것만 같았다.

페미니스트들의 교외 비판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3년 베티 프리던은 이 <이름 없는 문제>를 분석하면서 교외 생활에 대한 통렬한 비난을 쏟아 냈다.

"교외에 거주하는 모든 주부는 홀로 분투한다. 침대를 정리하고, 시장을 보고, 소파 커버를 고르고, 애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고, 애들을 보이 스카우트에 태워다 주고 남편 곁에 누워 잠들 때 그녀는 너무나 두려워서 스스로 자문조차 하지 못한다. <이게 다인가?>"

교외는 여자들을 부엌에, 직장 밖예 묶어 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외 셜계의 대전제를 생각해 보면 교외가 다양한 가족 형태와
노동 형태를 능동적으로 (혹은 다른 뭔가를 대신해서) 저해한다고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집이 상대적으로 넓고, 자가용이 여러 대 필요하고, 육아를 위탁할 곳이 없기 때문에 여자는 아예 직장에 다니지 못하거나 아슬아슬하게 살림 및 육아와 병행할수 있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남자가 직장을 그만두거나 더 나쁜 조건의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오랜 남녀 임금 격차를 감안할 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남자를 희생하는 것은 어차피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교외는 이성애자 가족 내에서, 또 노동 시장에서 특정한 종류의 성 역할을 후원하고 그것이 당연해 보이게 만든다.

교외에 존재하는 극소수의 대중교통 또한 이 직장인을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방향으로 실어 나르게끔 설계되어 있다. 시스템 전체가 직선 이동-다른 곳에 들르지도, 중간에 여러 번 멈추지도 않는-을 전제로 한다. 이는 일반적인 남자 통근자에게 유리하다.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의 출퇴근은 훨씬 북잡하다. 무급 노동과 유급 노동을 병행하느라 중복적인, 때로는 상충하는 용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가 돌인 엄마는 지역 버스를 타고 가서 8시에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긴 다음,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8시 반에 첫째를 학교에 등교시킨다. 그러고 나서 기차를 타고 9시까지 회사에 출근한다. 집에 돌아올 때는 이 과정을 거꾸로 하는데 중간에 슈퍼마켓에도 들러서 저녁 찬거리와 기저귀를 사야 한다. 이제 그녀는 짐 꾸러미, 유모차, 아이와 함께 만원 버스에 기를 쓰고 올라타서 마침내 집으로 향한다. 이때 그녀도 아이들도 요금을 여러 번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녀가 교외에 산다면 지자체가 바뀔 때마다 요금을 내야 할 수도 있
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중교통은 여전히 <핑크 택스>(비슷한 상품이나 서비스에 남자보다 여자가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것)'가 존재하는 분야 중 하나다. 여자는 남자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지만 더 나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세라 코프먼의 연구에 따르면 뉴욕시에 거주하는 아이 엄마는 매달 교통비에 최대 76달러를 남자보다 더 지출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엄마가 된 지 얼마 안 된 전축가 크리스틴 머리는 이렇게 물는다. <엄마들이 설계했다면 도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 개조되면서 엘리베이터가 없어졌음을 알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를 떠올리며 대중교통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한다. 그리고 버스에 휠체어가 탈 자리가 없는 것을 탄식하면서 아이 엄마를 위한 시설의 부재가 노인 및 장애인 문제와도 일맥상통함을 지적한다. 대중교통의 모든 면은 내가 설계자들이 상상한 이상적인 사용자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계단, 회전문, 회전식 개표구, 유모차 놓을 자리의 부재, 고장 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무례한 발언,  노려보는 시선. 이 모든 것이 도시가 부모 자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 또한 내가 이 장벽들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아이 부모보다 더 배려받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노인의 불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닫자 불현듯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설계자들은 우리가 직장, 공공장소, 공공서비스에의 접근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을 거라고 가정한 듯하다. 우리가 속한 가정 또는 기관에나 머무르라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동네에는 깨끗한 공원, 카페, 서점, 유기농 식품점처럼 중산층 부모들에게 유용한 편의 시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런 시설들은,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교통이 편리한 곳과 좋은 학교 근처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커런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위라벨 문제에 시장 중심적이고 개별화되고 민영화된 공간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공적인 도시 계획이 도시인들의 기대를 따라잡지 못하자 위라밸에 유리한 공간을 건설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직장 및 기타 편의 시설에 접근하기 쉬운 도심지를 <재발견>한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고 해서 여전히 도시에서 상당히 뒷전인 돌봄 노동이 갑자기 수월해지진 않는다. 대다수의 여성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제공하는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이 편의 시설들은 요즘 <육아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리는 사회적 추세와 맞물렸을 때 양날의 검이 된다. 그것은 <집중 육아intensive mothering>라는 현상에서 기인하는데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사론 헤이스Sharon Hays는 집중 육아를 <아이 중심적, 전문가적, 감정 소모적, 노동 강화적, 고비용적>이라고 정의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독점적이고도 헌신적인 판심을 쏟아야 한다는 이 육아 방식에 유례없는 기대가 쏟아지고 있다.
앤드리아 오라일리Andrea O'Reilly 같은 엄마 겸 학자들은 집중 육아와 새로운 <모성 신화>가 1970~198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성적, 경제적 독립 증가에 대한 불같은 백래시에 기름을 붓기에 딱 좋은 시점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이 집중 육아는 <육아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리는 다양한 과시적 소비 행태와 미학에서 나타난다. 좋은 육아의 기준 및 문화적 지표는 그것이 점점 더 도시 중상류층이 구매하고 체험하는 특정 상표, 스타일, 취미 활동에 의해 정의됨에 따라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쳐 왔다. 왜냐하면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부모들이 좋은 시설을 자기 동네에 유치하는 동시에 아이들을 위한 고가품 및 취미 활동 시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육아에 필요한 시간, 돈, 감정 노동의 양은 대부분의 가족, 특히 엄마에게 불가능하다.

풍부하고 사교적이고 홍미로운 활동이 딸에게 <필요>했기 패문예 매일매일 공원, 작문 교실, 커뮤니티 센터 놀이방에 가야 했다. 저녁에는 대중교통을 타고 시내 수영 강습도 다녔다. 어린이집. 학교, 볼일, 강습에 끊임없이 데려다주고 데려오기. 가족과 친구들 만나기.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 자신에게 집에 있으라고, 누우라고, 좀 줄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당시에는 줄인다는 게 가능한 선택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록 우리 동네의 많은 전업주부들이 내가 주간 대학원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은 내 일상 중에서 학업이 가장 쉬운 부분이었다는 점이었다. 작은 인간의 사소한 요청에 즉각 대답할 필요 없이, 그 아이의 정신적, 정서적 성장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1950년대의 전형적인 교외 엄마도 그렇게 쉼 없이 자식과 놀아 줘야 한다는 기대를 받진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건 집중 육아가 이미 1980년대부터 상승세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부모님 불일 보는 데 따라다니느라 하루 종일 미시소가 시내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하기도 했지만 유대교 회당, 무용 강습, 야구 연습, 수영, 스케이팅, 히브리어 교실에도 다녔던 어린 시절의 주말을 기억한다. 부모님은 스프롤 현상으로 점점 팽창해 가는 도시에서, 자가용 한 대에 운전면허 있는 사람도 한 명뿐인 상황에서, 가사와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운전면허를 따기 전까지 어머니는 간단한 볼일 하나를 보기 위해 45분이나 한 시간을 곧잘 걷곤 했다. 어쩌면 그저 집밖에 나갈 핑계를, 떼쟁이들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가게에 있는 시간을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나와 어머니는 엄마로서 꽤 비슷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나는 시내에 살아서 대중교통이나 공공 서비스 이용이 상대적으로 더 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에 수많은 불일 보기가 마법치럼 해결되지는 않았다.
금전적 여유가 있는 가족은 이런 모순을 타인의 저임금 노동에 의존함으로써 해결한다. 가족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또는 정부가 (예를 들면 저렴한 보육 서비스 제공과 같은)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이민자, 여자, 유색인 남자가 사회적 재생산의 외주를 말는다. 저임금 육체노동자 남편을 둔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유료 서비스를 이용할 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 지쳤을 때는 신용카드 대출로 식료품 배달을시키거나 대중교통 정기권을 사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했다. 매디의 다양한 활동에 돈을 쓴 것도 아이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 활동들이 보육의 기능도 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수영장에서 매디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30분 짬을 내어 학교 과제를 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자아 충족(학위를 따는 것)이 부분적으로 배달원이나 보모 같은 사람들의 저임금 노동을 이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의존했기 때문에 자연히 돌봄 노동을 위한 공공 인프라 부족이 여자들 간의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노동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층적인 착취에 가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의 영향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전 세계 도시 엄마의 생활을 바꿔 놓는다. 이를테면 부유한 직장 여성 사이에서 돌보미 수요가 중가함에 따라 각국의 여성 이민자가 인력을 채우기 위해 차출되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사도우미들은 싱가포르가 세계를 선도하는 금융과 미디어의 중심지가 되는 데 싱가포르 여자들이 일조할 수 있게 해준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브렌다여Brenda Yeoh, 설리나 황, 케이티 윌리스는 다른 많은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의 직장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를 남성 파트너와 동등하게 분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도우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캐나다에서는 필리핀과 카리브해 국가 출신 여성- 대부분 본인도 아이 엄마인ㅡ수천 명이 단기 체류 비자로 캐나다에 와서 보모, 가정부, 간병인으로 일한다. 밴쿠버 같은 대도시의 필리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제럴딘 프렛의 장기 연구는 자식을 고국에 두고 떠나와서 (때로는 몇십 년째) 캐나다 아이들을 톨보는 엄마들의 상실과 단절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고국의 자식들은 아빠, 조부모, 친척, 이웃들이 품앗이하듯 돌아가며 키우는데 그것은 엄마와 자식 사이에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를 감정적 거리를 낳는다. 프랫은 이 필리핀 여자들이 고국을 떠나오기 전의 삶이 우리 캐나다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의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최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남편과 자식들이 그저 <그림자 같은 존재>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가 어떻게 부담을 엄마들에게 떠넘기는지, 내가 속한 동네와 도시가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지를 직접 경험으로 알게 됐다.

유럽에서는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여성이 사회의 주류 영역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 결정권도 갖는 형태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의 관점으로 도시 계획 및 예산 결정에 접근하기 시작한 지가 더 오래되었다. 이 말은 모든 계획, 정책, 예산 결정이 성평등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정책 입안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향후에 성평등을 촉진할 것인지 저해할 것인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이 결정이 말 그대로 사회를 지탱하는 돌봄 노동에 이로울지 해로울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은 교육 및 보건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성 주류화 접근법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도시 계획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7 1999년에 대중교통 사용 실태를 조사했을 때 빈의 여성들은 돌봄 노동과 유급 노동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이동 패턴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아이들을 병왼에 데려갔다가 다시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출근한다. 저녁에는 친정 엄마와 함께 장을 보고 애들을 데리러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귀가한다.> 대중교통은 도시의 공공 서비스 및 공간 사용 방식에서 남녀가 큰 차이를 보이는 분야 중 하나였다. 시 당국은 대중교통 서비스를 개선하는 동시에 보행자의 이동성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몇몇 구역을 재설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페미니스트 설계자들이 상상했던 주거지-어린이집, 병원, 대중교통이 가까운-를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도시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빈의 성 주류화 접근법은 <말 그대로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있다>.

물론 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어느 도로와 어느 구역을 우선으로 제설할 것인가에 관한 결정은 도시가 어떤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지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시 당국은 도심과 연결되는 주 도로를 먼저 치우고 주거 지역 도로, 인도, 어린이 보호 구역은 마지막으로 미룬다. 반면에 스톡홀름 같은 도시들이 채택한 <성평등적 제설 정책>에서는 인도, 자전거 도로, 버스 전용 도로, 어린이집 주변을 우선으로 청소한다. 왜나하면 여자, 어린이,  노인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가능성이 더 높기 패문이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서 출근을 하므로 이쪽을 먼저 치우는 것이 타당하다. 스톡홀름 부시장 다니엘 헬덴Daniel Helldén은 캐나다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제설 방식은 자가용 선호를 더욱 강화하지만 스톡홀름의 방식은 모두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독려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기획은 현상을 답습하는 대신 <그들이 바라는, 변화된 도시> 를 추구한다.
성 주류화에는 한계가 있다. 빈의 공무원들은 유급 노동, 무급 노동과 관련된 기존의 성 규범 및 역할이 더육 강화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는 직장 여성이 통근할 때 겪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하이힐 굽이 끼지 않는> 보도블록에서부터 <분홍색> 여성 전용 주차장까지-가사 노통이나 돌봄 노동에서 나타나는 남녀 간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성별중심적인 관점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것도 또 다른 한계를 만들 수 있다. 전형적인 도시인이 너무 자주 백인 시스젠더 비장애인
중산충 이성애자 남성으로 상정되는 것도 문제지만 젠더 기획(gender planning, 정책이나 프로젝트를 젠더 관점에서 기획하고 구성하는 것)에서 상정하는 여성상 또한 비숫하게 제한적이다. 젠더 기획의 수혜자는 대부분 핑크칼라(pink collar, 미용사 치위생사 웨이트리스 보육교사처럼 대개 여자 직업으로 인식되는 업종.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보다 훨씬 낮은 급여를 받는다) 또는 화이트칼라의 기혼 유자녀 비장애인 여성으로 가정된다. 그려나 이 여성은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수자에 속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즉 성 주류화에서 다루지 않는 필요를 가진 범주의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도심을 벗어나면 이런 격차, 그리고 그 격차의 공간적 구성 요소가 쉽게 눈에 떤다. 내가 요크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 킬가를 따라 달리는 버스를 타면 저소득 유색인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가는데 그곳을 보기만 해도 그 동네 엄마가 다른 동네 엄마보다 더 힘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도 엄밀히 말하면 토론토 시내였는데도 불구하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다양한 상품을 고루 갓춘 슈퍼마켓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 동네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살을 에는 추위나 펄펄 끓는 더위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매일 쓰는 생필품을 사려고 해도 여러 가게 또는 상점가를 돌아야 했다. 이 엄마들이 아기가 낮잠 자는 동안 스타벅스에서 신문 읽을 짬을 낼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지리학자 브렌다 파커Brenda Parker는 밀위키에 기주하는 저소득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서술했다. 파커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사회 복지 예산 삭감이 이 여성들의 일상과 노동을 <확대> 및 <강화>하며 그 결과는  탈진, 질병, 만성 통증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도시를 돌아다니기가 힘든 이유는 위험한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대중교통이 늘 만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무료 급식소나 교회 가기, 사회 복지사나 아이들 담임 교사 만나기, 무료 급식권 지급소 방문하기, 관공서 및 보건소에서 한없이 기다리기 등 정부와 민간단체의 복지 혜택을 모두 찾아다니는 것>이라는 시간 소비적, 에너지 소비적 노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저임금연장 근무까지 합치면 육아의 기본적인 책임과 기쁨조차 감당하기 힘들다. 파커가 인터뷰한 사람 중 한 명인 오드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래 하루 여덟 시간 근무하는 직장에서 열네 시간을 근무하고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아이들 숙제조차 봐주기 힘들다.> 이 고난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저소득 유색인 여성은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시 외곽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으로 이사를 하면 도시 생활의 혜택-직장, 학교, 공공 서비스, 소매점, 대중교통, 가정 간의 상호 접근성이 높다는-이 확실히 줄어든다.

시 청책과 인프라가 도움이 안 된다면 저소득 여성은 돌봄 노동과 유급 노동을 병행할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파커의 밀워키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은 <아기를 옆에 태운 채 버스 운전사로 일했다. (...) 방 한두 개짜리 아파트에 두세 가구가 동거하는 경우도 드몰지 않았다. 여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서로 애를 봐줬고 그중 한 명이 유급 노동을 해서 모두를 '먹여 살렸다.'> 요하네스버그의 여자들은 아이를 친척 집에 맡기는, 가슴 아픈 결정을 하기도 했다. 집과 직장을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다 보니 편의 시설이나 좋은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은 벨 훅스나 퍼트리샤 힐 콜린스같은 흑인 페미니스트 저술가들이 오래 전부터 묘사해 왔는데 그들은 흑인 여자의 사회적 재생산이 대부분 정부의 징벌적 조치-아이 빼앗기나 <생산적 복지(workfare, 실업자가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구직 활동을 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제도)> 정책 같은- 를 받아 왔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가사 노동과 관련된 페미니즘 운동은 대개 백인 이성애자 기혼 여성을 중심으로 하고 유색인 여성만의 특수한 필요와 우려는 무시해왔다.

이소케이의 연구는 도시의 억압이 가진 <구조적 교차성에 맞서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와 싸울 때 다양한 공동체 간의 연합이 갖는 힘을 보여 준다. 나는 도시가 돌봄 노동과 사회적 재생산을 공동화함으로써 보다 덜 힘들고 더 공평하게 만드는 정책과 공간을 창출하길 원한다. 그러나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이분법을 타파하는 돌봄 방식을 이미 실천 중인 공간과 공동체에서 더 근본적인 변화, 더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도시의 청사진을 찾아야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2장> 친구들의 도시


나중에는 그날 밤 전체가 꿈처럼, 샐리와 나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허풍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이상한 밤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그러고는 입에 올릴 기회 자체가 드물어서 고등학교 졸업 후 샐리와 내가 소원해지고 나서는 그날 일을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어쩌다 오랜만에 떠올렸을 때는 그것이 내 상상은 아니었는지 자문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날 노숙자에게서 산 조악한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맥도날드 쟁반에 까는 종이 뒷면에 검은 펜으로 그린 그 그림은 당시 일기장에 붙어 있다.

우정은 도시에서의 자유를 가능케 했고, 도시의 거리는 우리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 줬다. 단순히 우리가 부모님에게 반항했다는 것, 규칙을 깼다는 것이 전부가아니었다. 밤의 도시에서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이동성과 관련된 사회 규범 및 성차별적 제한을 근거로 여자애들이 대개 배제되는 시간에 도시의 공공장소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를 성장하게 한, 어쩌면 변화시키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스웨덴의 건축사 사무소 <화이트 아르시텍테르>가 공공장소의 실물 축소 모형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10대 소녀들에게 물어봤더니 소녀들이 내놓은 대답은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곳, 비와 바람이 차단된 곳,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는 곳, 답답한 느낌 없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에 표시를 남길 수 있는 곳>이었다.

케일린 셰이퍼Kayleen Schaefer는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 Text Me When You Get Home: The Evolution and Triumph of Modern Female Friendship>에서 이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라는 문장이 여자들의 우정에서 갖는 역할에 대해 서술한다.

"우리 집에서 몇 불록 떨어진 곳에 사는 절친 루시와 나는 밤에 헤어질 때 서로에게 이 말을 한다. 한 명이 <사랑해>라고 하면 나머지 한 명이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라고 대답한다. 매
번 이렇게 똑같이 말한다. (...) 하지만 남자들은 친구한테, 집에 도착하면 문자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셰이퍼는 이 행위가 오로지 안전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는 방식이자 밤기을 혼자 걷는 여자라면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불편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문자하라는 말은 당신의 친구가 당신과 헤어진 뒤에도 휴대폰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뜻이자 클럽이나 지하철역에 당신을 데리러 가기 위해 친구들을 소집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상호 연결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행위다. 셰이퍼는 이 네트위크가 <여자들이 서로에게 "난 항상 네 곁에 있어. 네가 집에 돌아가는 동안에도 너에 대해 잊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방법이다>라고 설명한다.

최근 이사 레이Issa Rae가 기획하고 주연을 맡은 <인시큐어Insecure>에서 로스앤젤레스는, 흑인 여성들의 야망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입체적인 한 인간으로 보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흑인 여성의 생존에 우정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사와 절친 몰리(이본 오지Yvonne Orgi 분)는 직장에서의 인종 차별과 성차별, 그들의 지성과 재능을 존중하는 연인 찾기, 삶의 부침 가운데서도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등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간다. 과장되게 우스꽝스러운 <브로드 시티>와 달리 <인시큐어>는 세계적 대도시에서 겪는 실연, 경제적 불안, 성취 부진을 때로는 고통스러우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린다. 그러나 두 프로그램 다 우정이-아무리 문제가 많아 보여도ㅡ인물의 생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수십 개 도시에서 일어난 젠트리피케이션의 패턴을 관찰해 보면 버려진 동네가 멋진 동네로 탈바꿈할 때의 시발점이 학생, 예술가, 퀴어 공동체 같은 대안적 공동체의 존재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그 동네를 <쿨하게> 만든 사람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완료되고 나면 상승한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레즈비언은 남녀 임금 격차와 유서 깊은 차별 덕에 상대적으로 수입이 적어서 다른 동네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3장> 혼자만의 도시

장애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혼자 있을 권리를 침해당한다. (대개) 선량하지만 무지한 낯선 이들이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도와주겠다>며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열에 아홉은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이 따리온다. 예를 들면 멋대로 휠체어를 밀거나 시각 장애인을 안내한다며 팔을 붙잡는 것이다. 휠체어 사용자인 브론원 버그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뒤에서 휠체어를 잡았던 공포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낯선 사람은 너나이모시(市)의 번화가에서 갑자기 그녀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응답한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시각 장애인 사회 운동가 에이미 캐버나는 흰 지팡이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 통근 중에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붙잡자 #잡지말고물어보세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행
동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친절이 아닌 조급함이나 숨겨진 적의의 표현일 수도 있다. 휠체어 사용자 개브리엘 피터스는 택시 기사가 그녀의 휠체어를 급하게 택시 쪽으로 미는 바람에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던 일을 떠올린다. 버그처럼 캐버나도 사람들이 장애인을 잡기 전에 동의를 구하길, 장애인의 신체 자율권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버그는 말한다. <우리의 보조구는 신체의 일부다. 우리는 마음대로 옮겨도 되는 가구가 아니다.> 도시 환경이 물리적 장애물로 가득한 것도 이미 그들에겐 충분한 악조건이다. 버그는 낯선 사람이 자신의 휠체어를 잡은 후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계단 때문에 가게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기본적인 사적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으면 장애인이 자기가 원하는 혹은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도시의 공공장소를 마음껏 돌아다니기가 한층 더 어려워진다.

홀로 거리를 걷거나 사람 많은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은 특히 여자들에게 꿀맛 같은 시간이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가끔 혼자 외출했을 때 이것을 실감했다. 내 주위를 온통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내게 감정 노동을 요구할 권리는 그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몇 명은 되레 나를 돌봐주기까지 했다. 커피를 내오고, 테이블을 치워 줬다. 밖에 나가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의 칭얼거림이나 쉴 새 없는 질문에 대꾸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즐거웠다. 도시에서 외출해서 혼자 있는 것은 여자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집에서는 늘 뭔가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육아, 가사, 살림, 인간관계, 반려동물 등과 관련된 성 역할은 가정이 여자들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른 엄마들처럼 나도 화장실에서 불일을 보거나 샤워를 하다 방해받은 적이 많다. 이렇게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조차도 방해받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래서 온 가족이 잠든 후에 깨어 있느라 수면이 부족한 엄마들이 놀랄 만큼 많다. 어린 자녀 셋을 둔 어느 남자 불로거는 자기 아내가 필요 이상으로 피곤해하는 이유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듯은 밤이기 때문임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올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은 아이들이 끊임없이 만지고 떠들고 요구해서 <감각 과부하> 상태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남편과 시간을 보내지만 남편이 잠들기 전까지는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전무하다. 그녀는 잠을 몇 시간 더 자느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엄마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집에서 나가는 것임을 발견한다.

혼자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언제든 방해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공공장소에 있는 여자가 남성 동반자나 결혼반지 - 물론 동성 배우자의 존재를 상징할 수도 있는 - 같은 확실한 표지에 의해 임자 있는 재산임이 표시되지 않으면 만만한 대상이 된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원치 않는 남자의 접근을 가장 빨리 차단하는 방법은 남자 친구나 남편이 있다고 말하는 거란 사실을. 남자들은 여자의 거절보다 다른 남자의 재산권을 훨씬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제3의 장소란 집도 아니고 직장도 아니지만 지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비공식적인 모임 공간을 말한다. 캐나다 도시 거주자들이 스타벅스나 '세컨드 컵' 같은 스페셜티 커피숍 체인을 도시 공간으로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논문에서 사회학자 소니아 북먼은, 어떤 소비자들은 이 카페들을 <집 밖의 집>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폭신한 기구, 벽난로, 책꽃이, 은밀한 대화를 위한 작은 테이블, 전반적으로 환대하는 분위기를 갖춘 이 카페들은 많은 이에게 준공공의 집 같은 장소다. 그렇다면 이런 카페들이 여자 혼자 가도 환영받고, 편안하고, 상당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3의 장소>로서 카페들은 사람들이 혼자면서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환경(과 브랜드)을 세심하게 조성한다. 여성이 공공장소에 혼자 있는 것에 오랫동안 제재가 가해져 왔음을 고려할 때 커피숍은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군중 속에 익명으로 있기, 사람 구경하기, 공간 차지하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생각에 잠기기와 같은, 도시 생활의 정신적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 는곳이다.
더 눅(커피숍)처럼 <여성화된>, 반은 공공장소 같고 반은 집 같은 공간의 증가와 (피할 수 없는?) 스타벅스의 상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명백한 징후였다. 내가 피했던 공간들 - 차 위에 걸터 앉아서 담배 피우는 남자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웠던 도넛 가게, 지저분한 싸구려 식당, 스포츠 바 - 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값비싼 유모차를 미는 부모들이 더러운 인도 위를 느긋하게 걸어 다녔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성숙된 시장을 새로이 발견하면서 동네가 공사 소음으로 가득 찼다. 이러한 변화는 나 같은 여자들의 취향과 바람에 맞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 공간의 계급 변동과 도시 공간을 여자들에게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부동산 개발업자, 도시 계획가를 비롯한 <재활성화> 지지자들에게 이미 상식이 된 듯했다. 물론 그 중심에 위치한 여성의 이미지는 모든 여성이 아니라 백인 비장애인 중산층 시스젠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비전의 한계는 구세군의 이밴절린 여성 보호센터(Evangeline Women's shelter)에 단기간 혹은 그보다 오래 머물렀던 여자들의 경험을 통해 분명해졌다. 이 여자들은 해당 구역이 재활성화되는 도중에도 심각하고 만성적인 가난을 겪는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잠식해 들어올수록 그들의 존재는 이 동네의 거리에 점점 더 어울리지 않게 된다. 센터 규칙상 하루 종일 안에 머물 수 없어 자주 바깥에 혼자 있어야 하는 이 여자들은 군중 속에 홀로 있는 즐거움을 쉬이 경험하지 못한다. 사람 구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끊임없이 관찰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겉모습, 습관, 가끔씩 보이는 정신 질환의 표출에 의해 그들에게는 <타자>라는 표지가 붙는다. 이벤절린 여성 보호 센터가 수년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더 정크션이 빈민, 노동자, 장애인을 비롯한 <남들과는 좀 다른> 사람들의 동네였던 세월이 그토록 긴데도 말이다.
보호 센터 거주자가 공공장소에 혼자 있는 단순한 행위를 더욱 어렵게 만든 사례 중 하나는 센터와 이웃한 카페가 바깥에 두었던 벤치를 철거한 일이었다. 센터 거주자들이 거기에 앉아서 담배를 피운다고 고객들이 항의했기 때문이다. 카페 사장은 명절에 음식을 나눠 줄 정도로 센터에 우호적인 사람이었지만 공간을 <깨끗이 치워 달라>는 단골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그결과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안전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 하나가 사라졌다. 또 다른 사례들을 보면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한 이득을 논하는 온라인 토론방에서는 센터 거주자들의 트라우마나 정신 질환의 징후가 고약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괴물 쇼freak show> 같은 표현에는 늘 사회 규범에 맞게 행동하지는 않는 여자들을 향한 적개심이 담겨 있다. 이 사례들은 일부 여자들이 공공장소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가 늘어난 만큼 나머지 여자들에 대한 감시와 안전한 공간의 제거가 동시에 증가했음을 상기시킨다.

 

<4장> 시위의 도시


최근 반트럼프 여성 행진에서 모든 참가자가 분홍색 <푸시햇pusyhat>을 쓰기로 했던 건은 여성의 범주에 대한 좁은 생물학적 이해가 페미니스트 행사에 침투하여 트랜스젠더, 간성,논바이너리를 상징적으로 배제한 사례로 지적되었다. (**여기서는 분홍색 <보지 모자>가 여성의 상징으로 사용됐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보지 없는 트랜스젠더, 보지가 분홍색이 아닌 유색인 여성이 배제됐다는 것이다.) 
또 행진과 시위는 특정한 동작이나 공간 점거력, 물리적 대치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암묵적으로 비장애인을 정상으로 규정한다. 장애인들은 최근 장애인법 개정에 항의하기 위해 상원의원 사무실을 점거한 것을 포함, 수십 년째 대단히 눈에 띄고 공권력과 대치하기까지 하는 시위에 참가해 왔지만 장애가 주제가 아닌 시위는 대부분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접근 불가능한 경로와 집합소, 이동 속도,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준비 부족에서부터 구호와 플래카드에서 장애인 차별적 언어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시위는 대체로 장애인을 배제해 왔다.
장애인과 트랜스젠더는 사회 운동 단체를 책려하여 뚜렷한 증거를 남겼다. 토론토 같은 도시의 TBTN 운동은 이제 그 목표와 계획에서 교차성이 명백히 드러난다. 웹 사이트에는 TBTN 운동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성폭행, 아동성폭력, 가정 폭력 같은 성폭력 생존자들의 경험 그리고 경찰가혹행위, 인종차별, 성차별 같은 국가 폭력 및 기타 제도화된 폭력의 생존자들의 경혐을 기리는 민중 행사 (......) 이 행사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젠더를 환영한다."

또한 이 행사는 휠체어가 접근 가능하고 수어 통역, 도우미, 아이 돌봄 서비스가 제공된다.

 

<5장> 공포의 도시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공포는 물질적인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보수가 좋더라도 위험해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직장의 밤 근무는 거절해야 할지도 모른다. 직업 훈련과 관런이 있어서 이 수업을 수료하면 보수가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더라도 야간 수업은 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가 저렴하더라도 위험한 지역에 위치한 집에는 살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비용들은 <핑크 택스> 같은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조차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보다 더 명백한데도 누락되는 것은 여자들이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나 걷기 같은 저렴한 이동 수단을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자들이 하루에 걷는 걸음 수는 남자보다 휠씬 적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저널리스트 탈리아 새드웰이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세마랑, 브리스톨, 워싱턴 같은 도시들을 조사했더니 여자들이 학교나 직장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짧은 거리를 같 때도 택시나 우버,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자가용, 휴대폰, 보안 시설이 잘된 건물에 지출되는 비용 또한 재정적 부담이다. 남자들에게는 사치품처럼 보일지 몰라도 많은 여자들에게는 필수품이다. 그리고 물론 이 필수품에 대한 접근성은 수입, 인종, 장애, 시민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약과 비용과 스트레스는 간접적이지만 굉장히 효과적인 사회 통제 프로그램이 된다. 사회에 의해 강화된 공포는 우리가 도시 생활을, 인생의 매일매일을 최대한 즐기지 못하게끔 방해한다.
이 모든 것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가 여자들을 이토록 심하게 제재하는 것이 얼토당토않고 비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나? 손실은 개인에게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공포를 기반으로 한 선택 때문에 손실된 여자들의 생산성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순수한 경제 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적어도 모두에게 평등한 운동장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논리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성차별적, 인종 차별적, 트랜스젠더 혐오적, 동성애 험오적, 장애인 차별적 사회의 경제 논리는 경제력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권력이 우선 백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비장애인 남자에게 최대화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게 좀 추상적이라고 생각된다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 남성을 괴롭히는 <경제적 불안>에 대한 언론 매체의 반복적 보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집단의 분노 - 그리고 그들을 달래거나 그들의 바람을 충족해 주기 위해 존재한 적도 없는 영광의 과거를 복원해 주려는 계속적인 움직임 - 는 그들이 백인 남성이기 때문에 적어도 여성과 유색인보다는 사회 경제적으로 한두 단계 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이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그들의 믿음은 타집단에 대한 폭력으로 자주 나타나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삶에 공포가 또 한 겹 더해진다.

…성편향적 폭력은 항상 다른 형태의 폭력과 연관돼 있다.
도시에서 공공장소의 폭력과 범죄 공포는 곧잘 한 가지 문제, 이를테면 <여성 문제>로 다뤄지곤 하는데 그리면 개입의 형태가 제한되고 그중 일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성이 가진 다양한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찰을 늘리고 조명을 추가하고 CCTV를 설치하는 것은 거리의 성 노동자들을 오히려 더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경찰에게 단속 및 폭력을 당할 위험이 증가하는 데다 일하기 위해 더 위험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하기 때문이다. 불법 체류 중이거나 그 나라 말을 잘 못하는 외국인은 여성의 안전을 위해 만든 서비스나 공간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버스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에서 내려 달라고 말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물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간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인 여성이 안전과 관련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 또한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나 관행, 설계 변경을 실시할 때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사전에 잘 살펴야 한다. 모두에게 맞는 한 가지 해결책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가능한 한 교차적 접근법을 채택해야한다.

1990년대에 필라델피아가 -그중에서도 특히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 중이던 도심이-실제보다 안전해 보이게 만들기 위해 경찰이 범죄 데이터를 조작해 왔음이 밝혀졌다. 지리학자 앨릭 브라운로는 경찰이 수십 년간 고의적으로 성폭력, 특히 강간 신고를 <허위 신고>나 단순 <인물 조사>로 분류함으로써 조작해 왔음을 폭로했다. (중략) 필라델피아는 강간을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스스로가 (여성을 포함한) 젊은 전문직 독신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최고의 도시라고 광고할 수 있었다.
2017년 저널리스트 로빈 둘리틀Robyn Doolittle은 캐나다 전국의 경찰들이 범죄를 <허위 신고>로 분류해 버리는 경우가 깜짝 놀랄 만큼 빈번하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그 결과 거의 모든 관할구에서 감사가 이루어졌다. 결국 3만 7,000여 건의 사건이 재수사에 들어갔다. 둘리틀의 보도는 형사들 사이에 강간 신화가 널리 퍼져 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트라우마, 2차 가해, 지인 강간의 역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듯했다. 나아가 그 보도는 신고가 부족해서 여성 대상 폭력이 숨겨지기도 하지만 신고해봤자 상황을 바꾸는 데 거의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보여 줬다. 지금까지도 젠더 기반 폭력의 실제 규모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부분적으로 우리의 사법 기관들이 이 범죄를 축소하는 데 열심이기 때문인 듯하다.

백인들 - 여성 포함 - 은 유색인만 보면 재깍 경찰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효과적인 사찰 대리인이 된다. 그런데 그 책임의 일부는 <교도소 페미니즘carceral feminism>에 있다. 교도소 페미니즘이란 반폭력 운동의 일종으로, 젠더 기반 폭력의 해결을 경찰과 사법 제도에 의존하며 가혹한 처벌을 요구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학 교수 베스 리치Beth Richie는 <저해된 정의Arrested Justice: Black Women, Violence, and America's Prison Nation>에서 지난 몇십 년간 어떤 여자들의 안전은 개선된 반면, 취약 계층에 속하는 여자들은 <미국의 감옥 국가가 세 불리기를 하는 동안 반폭력 운동이 취한 사상적, 전략적 방향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다>라고 지적한다. 인종 차별적이고 계급 차별적인 사법 제도하에서 감금 중심적 접근법은 불평등을 심화하는 동시에 흑인, 원주민, 유색인 가정에 다시 낙인을 찍고 표적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교도소 페미니즘은 경찰과 도시가 실제로 여자들의 안전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거의 안 하면서 다른 주변화된 집단을 표적화하고 국가 폭력과 길거리 폭력에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정책과 관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시스템에 자기도 모르게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토론토의 아파트 개발 사업과 젠더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부동산 개발업자들과 중개업자들이 24시간 컨시어지 서비스와 보안 서비스, 지문 인식 도어 록, CCTV, 경보 시스템을 내세우며 이 아파트가 중심가에서 여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열정적으로 홍보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특이 사항들은 한때 버려진 산업 지구로 낙인찍혔던 <한창 뜨는>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 중점적으로 광고되었다. 그때 나는 개발업자들이 투자 위험성 높은 지역에 여자들에게 <안전한>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무사히 침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이런 형태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쫓겨날 여자들의 삶은 전혀 안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가정 폭력이 해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여자들에게 아파트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구입>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사유화라는 경향에 기여하는데 사유화란 사람들의 행복도, 범죄로부터의 안전에 대한 책임도 개개인에게 있음을 뜻한다. 안전을 사적 재화화 한다면 스
스로의 안전을 구입할 경제적 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더더욱 안전하지 않은 환정에서 살게 된다. 그것은 여자들에게 더욱 안전한 도시라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비전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우리는 안전한 도시의 형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사적인 안전 조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안전한 도시는 범죄 예방이나 적절한 조사를 경찰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해 보이는 겉모습을 위해 성 노동자, 유색인, 젊은이, 이민자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백인 여성 특권층의 필요와 욕구를 중심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 변화가 가부장적 지배를 무너뜨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것이다. 
최소한 가장 취약한 계층의 필요와 관점에서 출발하는 교차적 접근법이 요구될 것이다. 여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믿는 것이 표준 관행이 될 것이다. 사적 공간의 폭력과 공적 공간의 폭력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가 증가할 것이다. 강간 신화와 강간 문화가 해체될 것이다. 공포가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전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한 여성 친화적 도시에서 여자들은 단지 문밖에 나가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할 필요가없을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가 100만 한 가지 안전 예방 조치에 낭비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세상에 내놓을수 있는 것이 최대한 실현될 것이다.

공포나 트라우마를 경험했거나 낯선 이에게 개체 공간을 침해당하거나 신체적 요구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움츠러든다. 다양한 종류의 접촉을 찾아나서거나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거나 자신을 세상 앞에 내놓는 것을 전처럼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접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SUV를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4시간 보안 서비스가 있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자신과 외모도, 말투도, 행동도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선택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물론 여자들은 이런 충동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두려워하도록 사회화함으로써 여자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다른 형태의 배제, 분리, 차이에 대한 공포를 강요하는 시스템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여자들이 괴롭힘, 성적 대상화, 제약, 진짜 폭력을 경험하는 도시에서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기가 휠씬 더 어려울 것이다.

국가 및 기업의 강화된 감시, 군대화된 경찰, 공적 공간의 사유화처럼 신자유주의 도시성의 시대에 선호되는 수단은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 수단들 역시 여자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인, 사적 공간에서의 폭력을 해결하는 데는 거의 혹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경제적 평등이라는 해결책에 의존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저렴한 집세, 생활 임금, 무료 탁아소, 저럼한 의료비 및 교육비는 확실히 대부분의 여성 친화적 도시 비전에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비판학적인> 운동은 경제적 측면이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잘못된 가정하에 젠더, 인종, 성적 지향, 장애 문제를 투쟁의 주변부로 밀어낸다. 게다가 젠더 기반 폭력은 물론이고 돌봄 노동과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 해결책에만 의존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 큰 변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비전들이 정착민 식민주의나 도시의 탈식민지화 가능성을 해결하려 하는 경우는 드물다. 캐나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정착민 식민 국가에서는 벌써 한참 전부터 공간에 대한 모든 도시 계획 결정에 원주민 부족들의 의견을 반영했어야 했다. 대규모 탈식민지화는 아직 먼 훗날의 일일지 몰라도 도시 토지 이양이나 도시 보호 구역을 통해 원주민이 식민지화된 도시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수 있다.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여성 혐오와 구조적 정착민 폭력의 복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원주민 여성이 도시에서 직면하는 폭력을 해결하는 것이 도시 화해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하다.

 

<나가며: 가능성의 도시>


영국에서 <E15 엄마들>로 알려진 <포커스 E15> 캠페인의 여자들은 런던시 의회가 공공 주택 철거를 결정했을 때 퇴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다른 여러 도시의 공공 주택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치솟는 집세, 보조금 삭감, 공공 주택 부족으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이 런던 변두리와 그 너머까지 쫓겨나는 가운데 전시 차원에서 실시하는 사회적 청소 절차>에 저항한 이들의 캠페인은 2013년 이래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영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공공 주택 거주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상황에서 이 단체는 공공 주택을 대량 철거 해서 재개발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운동들을 비롯한 수많은 운동들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여성 친화적 도시의 비전이다. 이 비전들은 우리에게 유급 노동, 돌봄 노동, 사회적 재생산을 새롭게 조직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이 관계들을 조직하는 기본 바탕에 이성애 핵가족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여자가 경제적, 물리적으로 가족이나 남자에게 보호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지도 않는다. 물론 각자가 자신만의 새로운 가족 형태를 만들고 키워 나가는 것의 중요성은 인정한다. 여성의 자율성도 인정하지만 동시에 친구들, 지역 사회, 사회 운동과의 연결성 또한 인정한다. 이 비전들은 자기 집에서, 거리에서, 화장실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은 모든 사람의 연대를 환영한다. 특권과 억압의 여러 시스템에 대한 성 편항적 문제의 교차성을 인정하며 백인 여성 특권충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성공의 표지인 페미니즘을거부한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그것을 실현하는 데 청사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슈퍼 페미니스트 도시 계획가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 주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가 어떻게 사회를 (젠더, 인종, 성적 지향등과 관련하여)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설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도시 공간을 사용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대안적 공간을 만드는 데는 끝없는 선택지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고 키우는 법만 배울 수 있다면 작은 여성 친화적 도시들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출세 지향적 프로젝트다. 사실은 완성에의 유혹에 저항하는, <완성> 계획이 없는 프로젝트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도시 세계에서 다르게 살기, 더 잘 살기, 더 공정하게 살기에 관한 현재 진행 중인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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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풀이]


교차성(intersectionality)/ 이를테면 흑인 여성의 경험은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따로따로 고려해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이 둘은 상호 작용, 특히 상호 강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

교차성 페미니즘 이론/ 1989년 흑인 페미니스트 학자 킴벌리 크렌쇼가 만든 용어를 바탕으로 1990년대에 퍼트리샤 힐 콜린스나 벨 훅스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발전 시킴

강간 신화/ 피해자에게 비난을 전가함으로써 성희롱과 성폭력의 존속에 기여하는 일련의 잘못된 생각과 오해. 강간 문화rape culture라고 부르는 것의 주 요소. "그날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와 "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는 성폭력 생존자에게 던져지는 전형적인 강간 신화 질문. 

테뉴어 트랙/ 종신 재직권을 목표로 하는 조교수가 속한 과정. 테뉴어 트래깅 아닌 교원으로는 초빙 교수, 객원 교수, 겸임 교수 등이 있다.

problem that has no name(이름 없는 문제)/ 자녀가 있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전업부부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현상. 훗날 중산층 고학력 여성의 배부른 불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캐나다에서는 10월을 '성 소수자 역사의 달'로 기념하는데 이때 열리는 여러 가지 행사 중 시가지 행진을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라고 한다.

도시는 "돌로 쓴 가부장제" (제인 다크)

third place/ 미국의 도시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만든 개념으로 제1의 장소는 집, 제2의 장소는 직장과 학교다.

 


- 레슬리 컨, Feministy City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