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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행동

edwannabefaye 2023. 2. 28. 18:39

“빈곤-차별의 악순환 끊는 차별금지 조치가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유엔 보고서 발간

 

<이채윤 / 아랫마을홈리스야학 교사, 홈리스행동 번역팀 활동가>

작년 11월 30일, ‘차별 없는 의료실현’을 주제로 열린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의원회관을 방문한 홈리스 당사자가 입구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다. 방문증 작성, 신분증 제시 등 출입을 위한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국회의원회관 측은 홈리스의 복장을 문제 삼았다. ‘행색’을 이유로 한 차별이었다.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인 빈곤
적절한 주거가 없는 홈리스 상태는 단지 물리적인 집의 결핍이나 부재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국회 출입을 제지당한 홈리스의 경험에서 드러나듯 ‘이상한’ 혹은 ‘더러운’ 행색은 차별의 빌미가 된다. 이러한 차별 조치는 홈리스 상태가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씻기 어려운 조건임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거리홈리스가 들고 다니는 무겁고 방대한 짐 역시 차별의 이유가 되곤 한다. 홈리스의 짐은 ‘집 없음’을 드러내는 표지이자 그 자체로 그의 집이다. 그러나 홈리스의 짐은 주거 지원 등 적절한 개입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이들을 방치하고 내쫓을 빌미로 작동한다. 이처럼 홈리스 상태는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빈곤과 차별의 연결 고리를 지적하고 이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빈곤한 상태는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의 부족으로 치부되고, 능력에 따른 차별적 조치는 일면 정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빈곤이 차별의 원인이 되고, 차별이 다시금 빈곤을 낳는 구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홈리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모자라다.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UN 보고서 발간
지난해 7월 15일, UN 극빈과인권에관한특별보고관(올리비에 드 쉬테)이 보고서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빈곤철폐를 위한 핵심수단>을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는 빈곤층의 권리 보장과 빈곤철폐를 위해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구체적으로 보고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가 차별과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빈곤과 차별의 연쇄를 끊기 위해 ‘적극적 평등화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비롯해 포괄적인 ‘반(反)차별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제도 역시 홈리스에 대한 형벌화 조치에 근거해 홈리스를 통제하고 처벌하고, 분리하는 등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철도시설 내 노숙 행위를 금지행위로 정하는 <철도안전법>은 홈리스 퇴거조치의 정당한 빌미를 제공한다. 차별을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법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법체계 자체가 어떻게 가난한 상태를 차별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포괄적인 반(反)차별 체제 구축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 필요  
보고서는 사회경제적 취약성으로 인한 차별에 대응하는 반차별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공공기관의 결정과 그로 인한 영향이 차별적이지 않은지를 살피는 것뿐 아니라 고용주를 비롯한 민간 기관 행위자의 차별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지불 능력이 없어도 필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공공영역의 의무’로 명시한다. 법적으로 차별 사례와 차별금지 사유를 폭넓게 해석하는 것 역시 중요하게 다뤄진다.
 
겉으로만 중립적인 간접차별에 대응해야
포괄적인 반차별 체제는 “겉으로만 중립적인 기준과 절차”로 인해 벌어지는 간접적인 차별에 대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행정상 주소지가 없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을 비롯한 여러 복지서비스 접근권을 제약하는 것은 간접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다. 간접차별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빈곤층에게 불균형한 영향”을 미친다. 절차상 주관적 평가가 개입될 여지가 클 경우, 편견과 고정관념을 근거로 불이익이 가해질 수도 있다. 억양이나 옷차림, 말투, 비언어적 태도 등 소득이 낮은 배경을 드러내는 특성이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복지제도의 시장의존도가 높을수록 간접차별의 위험은 더 커진다. 예컨대 공공임대주택의 공급보다 민간 임대시장 임대료 지원에 방점을 두는 한국의 주거복지 제도는 홈리스가 집을 구하고 거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차별의 교차성을 고려해야
차별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교차적으로 발생한다. 보고서는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성별, 장애 등 다른 지위와 결합할 때 차별에 더욱 취약함을 강조한다. 많은 여성홈리스는 남성이 다수인 쪽방과 고시원에서 살며 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이로 인해 여성전용 거처에 거주하기를 원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한 여성홈리스가 여성전용 고시원에 입실하고자 했으나 홈리스라는 이유로 고시원 입실 계약을 취소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곳은 그가 빠른 시일 내에 입실할 수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이는 홈리스라는 이유로 입주를 거절당해야 했던 차별이자, 여성홈리스의 경험을 교차적으로 포괄하지 못한 제도적 실패의 사례다.
 
악순환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해 빈곤과 차별의 악순환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해당 보고서는 빈곤과 개개인의 지위를 빌미 삼는 차별 경험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보탠다. 
 
빈곤과 차별의 맞물림은 곧 일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것과 물리적인 조건을 바꾸는 일이 함께 가야 함을 의미한다. 차별을 차별이라 말하는 것에서 출발해, 함께 빈곤-차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조건을 질문해나가자.  

 

 

그놈의 합리성, 꼴도 보기 싫어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 그리고 ‘합리적’ 무정차라는 공공의 폭력 

<민푸름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새해 첫 월요일 아침부터 삼각지역을 찾았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지하철행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에는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길을 가로막아 삼각지역에 가지 못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수백의 경찰들과 서울교통공사보안관이 승강장마다 배치되고, 일렬로 늘어서 경찰방패를 들고 휠체어 이용자들을 비롯한 모든 지하철행동 참여자들의 지하철 승차를 막는다. 나중에는 아예 열차를 ‘무정차’ 통과시킨다. 실제로 전년도 12월부터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행동에 대응하여 지하철행동이 진행되는 역사에 열차가 멈춰 서지도 않도록 ‘무정차’ 통과시키고 있다.

언론은 보도한다. 지하철을 타려는 전장연과 타지 못하게 막는 서울시 사이의 갈등을. 그러니 지하철행동이라는 ‘전술’과 이에 대응하는 시의 ‘조치’에 방점이 찍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말한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도 너무하지만, 그래도 더 나은 전술이 필요하지 않겠어? 장애인권리예산 확보도 장애인권리보장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더 합리적인 전술이 있을 거 아냐. 나는 이런 요구를 종종 생각한다. 투쟁의 방식보다 이유에 더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게 아니다. 그보다 어떤 운동이나 투쟁이 이성과 합리성을 무기로 경합해야 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지향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더 나은 전술을 찾아보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는 경제학 교과서 어딘가에 나와 있을 것 같은 모범 사례가 떠오른다. 합리적인 요구를 합리적인 전술로 촉구하면, 시민들은 동의하고, 나아가 합리적인 정부와 지자체는 요구안을 검토하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단계적으로 시행할 것을 구분하여 결국 가까운 미래에 그 요구안은 관철될 것이라고. 그게 바로 협상이고, 그런 협상이 운동의 성패를 결정할 거라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묻고 싶어진다. 당신이 경험한 정부가, 국가가 정말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대인지.

 

작년 1월 서울역사 안에는 서울교통공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었다. “엘리베이터 내/외부 대소변 금지, 엘리베이터 내/외부에 대소변을 보는 노숙인 발견 시 역무실로 신고 바랍니다. 적발 시 CCTV 확인 후 고발조치 예정.” 비슷한 일이 재작년 12월에도 있었다. 혜화역에서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이 진행되던 당시에 혜화역 승강기가 원천 봉쇄됐다. 봉쇄된 승강기에는 이러한 안내문이 혜화역장의 이름으로 붙었다. “금일 예정된 장애인단체의 불법시위(휠체어 승하차)로 인하여 이용시민의 안전과 시설물 보호를 위하여 엘리베이터 운행을 일시 중지합니다.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혜화역장)”


지하철행동 현장에서 나는 보았다. “왜 남의 직장에 와서 행패냐”며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던 공사 직원,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참여자들에게 “어차피 그래봤자 못 타는데”라며 동료와 낄낄 웃던 경찰, 내 귀 바로 옆에 앰프를 대기에 치워 달라 하자 “에베베베”하며 조롱하던 공사 직원, 야유하며 지나가는 시민에게 “경찰이 못하는 말 대신해주셔서 감사하다”던 경찰.

 

안내문이든 집회 현장의 언행이든, 공공의 이름으로 동료시민을 협박, 위협, 분리, 배제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엘리베이터 봉쇄, 탑승 저지, 무정차라는 발상이 경찰과 공사 직원 개개인의 수행과 안내문으로 역 안에, 승강장 앞에 시현되기까지, 나는 이것이 어떤 합리적인 고민의 과정을 거친 건지 모르겠다. 찰나라도 합리적인 고민을 했다면 싫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괘씸한 날 것의 감정들이 그 자체로 공공의 조치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고, 안내, 규제와 같은 조치가 사적인 대응 이상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잠깐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혐오가 공적 언행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되묻는다. ‘합리성’의 언어가, 그 조치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가리고자 동원되는지 아느냐고. 누군가 그 조치를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실은 그 배후의 지극히 감정적인 의도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냐고. 

나는 묻는다. 어떤 감정들이 어떤 조치와 행동을 낳았는지, 어떤 감정을 가리기 위해 합리성이라는 말이 동원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동료 시민들을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만든 데에 합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동력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는 요청한다. 합리성이 아니라 현장을 날뛰는 감정들에 주목해 달라고. 감정을 죽이고, 치우길 요구하기보다 어떤 감정이 이곳에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 생각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