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3.
세상이 고요해지는 시간 잠들지 못한 단 한 사람을 위한 목소리, 심야 라디오
몇 달 전, 새벽 세시의 라디오에서 너무나 평범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놀란 적이 있었다. 대학가의 카페에 앉아 있노라면, 옆 테이블에서 들려올 만한 보통의 연애담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이야기. 유명인의 멋진 사랑 이야기라면 그냥 꺼버렸을 텐데, 대단찮은 이야기라 오히려 더 솔깃했다. 처음에는 떨리던 목소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분해졌고, 이야기도 점점 진솔해졌다.
방송이 끝나갈 즈음에야 그게 일반인이 일일 디제이(DJ)로 참여하는, ‘심야 라디오 디제이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었던, 오히려 그래서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 뒤로 계속 들어보니 교사, 만화가, 회사원, 대학생, 주부 등이 날마다 마이크 앞에 앉아서는 자신의 꿈을 얘기하고 누군가를 추억했다. 어쩌면 이뤄질 수 없는 꿈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남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여서, 사랑했던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이야기여서 그들의 목소리는 때로 한없이 낮아졌다.
새벽 세시가 아니었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일산 호수로 교차로가 보이는 내 책상에서 바라볼 때, 새벽 세시는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파도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뜸해진다.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와 있는 것과 같으니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다. 글쓰기 가장 좋을 때의 나는 가장 고독한 나다. 작가를 꿈꾼다면, 피할 수 없는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꾼다고 하더라도 고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때든. 새벽 세시에 라디오를 켜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다고 해도 심야 라디오는 방송되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 있다면. 그게 바로 심야 라디오의 본질이리라. 한 사람을 위한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보다 더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것.
최근에 출간된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에는 나치 시절 독일의 고아 소년 베르너가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서 여동생과 몰래 듣는 장면이 나온다. 라디오를 켜자 단파대로 누군가 ‘즈’와 ‘스’가 잔뜩 들어간 생경한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베르너는 헝가리어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헝가리는 여기서 얼마나 멀어?” 여동생의 물음에 베르너는 말한다. “수천 킬로미터쯤?” 둘은 그렇게 라디오에서 들리는 낯선 도시의 이름을 받아 적는다. 베로나, 드레스덴, 런던, 로마, 파리, 리옹. “야밤의 단파대. 길을 거니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 미친 사람과 고함치는 사람들의 세상.”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1980년대 중반, 내 방에 놓여 있던 라디오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 내가 듣지 못한 음악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며 나는 새벽 1시부터 하는, 전영혁씨가 하던 프로그램에 빠져 있었다. 한국 노래 아니면 영어 노래 일색이던 낮 방송과 달리 그 시간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서 만든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제목을 받아적을 수 없어 들리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으며 나는 그 먼 나라들을 떠올렸다. 제스로 털의 ‘엘러지’를 배경으로 전영혁씨가 한편의 시를 읽어주며 방송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먼 곳을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다음에는 경직된 목소리의 남자가 나와서 “여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라든가, 뭐 그런 멘트와 함께 애국가를 들려줬다. 그렇지만 그 밤에 혼자 일어나 경례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는 기껏해야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이었고, 눈만 감으면 언제든 잘 수 있었으니까. 때로는 애국가까지 듣지도 못하고 잠드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아침에 다른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깨곤 했다. 아침 라디오에서는 늘 맨손체조에 구령을 붙이는 체육 선생님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야 라디오와 아침 라디오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송출되는 듯했다.
때로는 애국가가 끝나고 백색 소음이 시작되고 난 뒤까지도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밤이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내 마음이 검은 밤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런 밤이면 나는 모든 방송이 끝났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목소리를 찾았다. 새벽에는 낮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많이 잡혔다.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해서 제대로 들을 수 없는 방송은 북한에서 송출되는 것이었다. 방해 전파는 중국 방송이나 일본 방송에는 관대했다. 우리 쪽에서 북쪽을 향해 송출하는 방송에는 ‘흑룡강성’이니 ‘길림’이니, 그런 낯선 지명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흘러나왔다.
그날도 아마 잠 못 드는 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베르너에게 헝가리어가 들리듯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러시아어였다. 물론 나는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몰랐으나 그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아마 라디오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남자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상상했다. 무엇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도시에 사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지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라도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깊은 밤, 떠다니는 마음이란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심야 라디오는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를 향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방송이다.
소설 속 베르너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스위스의 민담학자 막스 뤼티는 1960년대 초반 베로뮌스터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일반 청취자들에게 유럽 민담들의 특징을 설명했다. “아직 라디오도 없고 책도 없는 옛날에는 저녁때면 모여서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믿고 있었고, 이제는 책과 더불어 라디오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디오로 방송된 일련의 강연은 <옛날 옛적에>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그 책 199쪽을 펼치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1960년대 초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던 노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광경이 떠오른다. “암흑 속의 빛(Lux in tenebris). 이것이 세상에서 기적이 갖는 의미다. 기적은 어둠 속의 빛으로서 민중과 작가의 표상 속에 살아 있다. 왜 우리는 성탄절 밤에 촛불을 켜는가? 우리는 그 빛을 그 밤에 일어났던 기적의 상징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와 문학은 빛의 상징을 알고 있다.”
암흑 속의 빛. 그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빛이다. 그렇기에 기적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베르너처럼 깊은 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에 단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70년대 추풍령휴게소 동물원 원숭이는 왜 ‘타잔’의 치타처럼 다정하지 않았을까
19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된 뒤 제일 먼저 건설한 휴게소는 추풍령휴게소였다. 왜 여기에다 휴게소를 만들었을까? 공식적으로는 총 428㎞의 중간 지점인 214㎞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안내가 있지만, 내가 태어난 동네의 설명은 다르다. 김천시 홈페이지를 따르면, “광천 1리 추풍령휴게소가 있는 곳은 <정각록> 비결에서 백년 뒤에는 뭇사람이 모여 논다는 곳으로 예언하여 다락곡(多樂谷)이라 했는데, 과연 고속도로 휴게소가 되었다 한다.” 어떤 신문에서는 휴게소 변천사를 다루며 1990년대 이전까지 휴게소는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 만한 곳은 아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이 예언을 소개하던데, 그러면 곤란하다. 이 예언은 내가 꼬마였을 때 이미 다 이뤄져 해마다 봄이면 벚나무 꽃그늘 아래가 놀러 온 사람들로 빼곡했다.
추풍령휴게소로 뭇사람을 끌어들인 데에는 벚꽃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동물원이 큰 역할을 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중인 1974년 대통령비서실의 ‘소동물원 개원보고(추풍령휴게소 지역)’를 보면, 휴게소 이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볼거리 공간을 조성하고자 1973년 12월에 완공한 뒤 이듬해 110마리의 동물을 구입과 기증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또한 동물의 종류는 원숭이와 사슴 등 전체 16종으로 구성됐으며, 1974년 4월부터 6월까지 관람자 현황은 2만3400명으로 1일 평균 390명이었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에 나오는 원숭이가 바로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원숭이가 아닐까? 내가 추풍령휴게소에 가서 원숭이를 직접 본 건 1970년대 중후반이니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다. 나는 이 원숭이에 대해서 할 말이 좀 있다.
내가 유인원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티브이 드라마 <타잔> 때문이었다. 타잔의 옆에는 늘 치타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붙어 다녔다. “왜 제인이 아니고 치타인가?” 그런 의문을 느낄 법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치타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치타는 상당히 인간적인 침팬지였다. 예컨대 타잔과 제인이 키스라도 할라치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센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풍령휴게소에 원숭이를 구경하러 갈 때에는 치타와 같은 재주를 기대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연예인을 직접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환호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그 원숭이는 치타처럼 팔을 아래위로 흔들며 손뼉이라도 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호응은 없었다. 티브이 속 인간적인 치타와 달리 그 원숭이는 동물적이었다. 우리 안을 뛰어다니며 깍깍대며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욱 험악해 보였다. 철창 사이로 새우깡을 건네주던 아이들은 그러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어떤 여자애가 선의로 과자를 내밀었다가 원숭이한테 엄지손톱을 뽑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원숭이는 오전부터 술에 취해서 주정을 해대는 동네 아저씨와 비슷했다. 그 시절에 그런 사람은 근대화에 역행하는 사회악이었다. 그런 구폐를 없애려면 강력한 정신교육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다. 훈련을 받으면 치타처럼 티브이에도 출연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추풍령휴게소의 철창에 갇혀 아이들의 조롱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험악한 원숭이와 절대로 꼬리를 펼치지 않는 공작에 실망해서 동물원을 나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가면 인터체인지를 형상화한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이 나왔다. 거기에는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 있었다. 이 ‘근대화의 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기념탑에 새겨진 이은상의 ‘고속도로의 노래’를 참조하면 된다. “세기를 앞당기는 고속도로/ 빛을 향해 달리는 우리 행진/ 뒷날의 역사는 증언하리/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겼다고/ 달려라 승리의 길/ 달려라 통일의 길/ 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 즉 ‘조국 근대화의 길’이란 승리의 길, 그리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길인 셈이다.
“왜 치타는 그토록 타잔에게 복종적이었는가?”를 내가 마침내 이해하게 된 건 영문학과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공부할 때였다. 그 수업에서 나는 그토록 다정했던 프라이디가 길들여진 식민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릴 때 즐겨 읽었던 소설인지라 그런 식의 분석에 바로 반감이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늘 로빈슨 크루소와 동일시했지, 단 한 번도 내가 프라이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황인종이라면 프라이디에 더 가까울 텐데 말이다. 그건 ‘타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치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에 비하면 타잔과 로빈슨 크루소는 이성을 이용해서 고난을 이겨내고 자연을 정복한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길, 역사를 창조하는 길, 그러니까 근대화의 길일 것이다.
2004년, <밤은 노래한다>라는 장편소설을 쓰려고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내가 쓰려는 소설 속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소비에트를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이 서로를 일본군의 첩자라고 지목하며 죽이고 있었다. 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부인하면 그처럼 독하니 일본군의 첩자가 맞다고 했고, 살고 싶어서 인정하면 그러니까 일본군의 첩자가 맞다고 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오브라이언은 손가락 네 개를 들어 보이며 윈스턴 스미스가 그게 다섯 개라는 걸 말하라고 고문하는데 그건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다. 실제로 다섯 개로 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네 개를 다섯 개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내가 소설로 쓰려고 했던 민생단 사건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거기에 이미 답이 있었다.
그렇게 소설 쓰느라 밤을 꼬박 지새운 다음날 새벽, 창문을 열어보니 연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머리라도 식히고 싶어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숙소인 연변대학교에서 시내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왼쪽으로 동물원이 나왔다. 새벽인지라 아직 개장 시간이 아니었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동물들이 뭘 하면서 지내는지 늘 궁금했던 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동물들은 우리 안에 다 들어가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우중산책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가다보니까 원숭이 우리가 나왔다. 이제 나는 어린 시절처럼 원숭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별다른 기대도 없었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처마 끝에 앉은 원숭이가 보였다. 그 원숭이는 가만히 앉아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쓴 채 그 원숭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비가 그칠 때까지는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는데,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평화로웠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는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다가 그날 오전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허구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다. 이 허구는 단 한 종류의 삶에서만, 아니면 아주 소수의 비슷비슷한 삶에서만 당신의 삶이 꽃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어떤 원숭이도 길들여지거나 포악해지지 않는다. 역사든 에고든, 내가 뭔가를 창조하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