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향으로 온다. 바람이 면에서 선으로 불기 시작할 때 겨울은 감지된다. 길고, 얇고, 뽀족해 콧속에서 와르르 산산조각이 나는 겨울바람에서는 차가운 결말과 냉랭한 시작의 냄새가 난다. 붙잡지 못한 시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계절. 시간이 눈처럼 따뜻할 일은 없다. 나는 빨개진 코끝을 만지며 걷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얼음이 뼈와 살과 근육을 다 통과해버린 것 같다. 젖은 발밑을 바라볼 때마다 눈 위로 흐른 얼음물이 코끝으로 툭 떨어진다. 나는 그 어느 겨울에도 그 어떤 시간도 다 녹이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매해 겨울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매번 불완전한 정산 내역을 받아 들었다. 올해의 결말은 늘 실패였고 새해의 시작은 잔인할 만큼 빨랐다. 너는 네가 원한 것을 절대 가질 수 없다고 겨울은 이야기했다. 네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시기는 예전에 나버렸다고 그는 선언했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그 차가운 공기가 좋았고, 동물들도 사라져 조용한 풍경이 좋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움켜쥐는 것이 좋았고,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이 좋았고, 연말의 흥성한 분위기가 좋았고, 크리스마스의 예쁜 장식이 좋았고, 눈을 밟는 소리가 좋았고, 모두들 할 일을 내년으로 미루며 반쯤은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 그렇게 맞이한 새해도 그다지 부지런하지는 못한 것이 좋았다. 그 따뜻한 분위기가 내 것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겨울에 가장 외로워하면서도 가장 사람들 속에서 산다고 느꼈다. 앙상한 나무에조차 짚으로 된 옷을 둘러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린 발을 녹여가며 겨우 잠이 들 때엔 누군가가 나에게 위로를 둘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 그가 겨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겨울과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절망시키면서도 동시에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겨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대학교에서 이중전공으로 칠학을 선택하기까지 늘 철학의 영토 주변부를 맵돌았다.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철학을 더 공부하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보다 큰 그 무언가에 나를 바치고 싶다는 생각, 그리하여 그 거대한 생각의 제전 속에서 웅크릴 자리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철학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조사하고 글을 쓰는 과정은 삶의 다른 가능성을 기꺼이 잠시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했고, 철학의 부름은 무슨 짓을 해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삶의 조건과 삶의 근거를 가장 깊은 곳에서 탐구하는 학문. 지적 자산에 대한 존중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 나와 다른 이의 삶을 돌아볼 때의 철저함에 평생 끌려왔다. 대학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읽으며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어느 오후나 항연 속 애지자로서의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받았던 감동의 순간은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흥미 때문이라면 혼자 책을 읽으며 공부하면 그만이지. 대학원이라는 형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철학을 취미로 읽는 것과 학계 안에서 지적받으며 공부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배우고 비판받고 읽고 쓰고 싶었다. 혼자 읽고 마는 게 아니라 같이 읽고 확인하고 교정받고 싶었다. 제멋대로 읽기 쉬운 철학 텍스트를 엄정하게 읽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생각을 다듬으며 쓰고 또 쓰고싶었다. 규칙적인 수업을 들으며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싶었고, 이해가 되지 않아 포기하는 대신 과제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었다. 한 텍스트를 읽기 위해 필요한 다른 텍스트들을 추천받고 싶었고 하루를 다 써서 그런 책들을 읽고 싶었다. 열 중 둘은 내가 이런 것들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학원을 권했다.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나는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쓴다. 더 이상 세상을 생각하며 울지 않지만 세상의 무한함에 여전히 매료된다. 세상을 보는 안경들은 내내 흥미롭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땅을 더듬어가며 짐작해본다. 나의 쓰임이 이곳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어림해보며. 삶에 저울이 있다면, 저울이 있어서 불안이며 열정이며 경력 같은 것을 놓고 셈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저울은 큰 바다를 향해 힘껏 기울었다. 아무도 쓸모를 묻지 않으나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찬 바다로. 이곳에 잠겨 질식하더라도, 나보다 큰 이곳에서 나는 기꺼이 웅크린다. 몹시 행복하다.

학창 시절의 하루하루는 끔찍하리만치 천천히 흘러갔다. 매초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흘러가는 바람에 원래의 몇 배가 되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간절히 라디오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라디오는 오늘 하루가 또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침 6시가 지나면 8시가 온다. 8시가 지나면 10시가 온다. 오후 2시가 지나면 4시가 오고, 저녁 7시가 오고,밤 10시가 오고 마침내 12시가 온다. 라디오는 착실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어 나를 안심시켰다. 그 시간 동안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들이 나와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더 이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없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트위터에서 하루 종일 회자되는 사건이 페이스북에서는 잠잠하고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의 '유행'이란 주류로 분류되는 몇 개의 매체에 동시에 노출될 때에만 간신히 성립하는 총류의 것이다. 그리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 필요하기에 기업이 유행을 주도하기는 더욱 용이해진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해석하며 유행이란 이 종교를 유지시키는 제의와도 같다고 보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화신과도 같은 거대 자본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제의를 계속해서 규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유행이란 동시성의 감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만들어진 감각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고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만큼 섬똑한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반대로 모두가 획일화의 틀에 간힐 것임을, 결국 그 들을 깨야 할 것임을 줄줄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바라건대 그리운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DJ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또 한 번 돌아오는 하루의 짐을 조금 나눠 질 수 있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다.

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책으로 진입하는 머리글을 읽을 인내심과 스크린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두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합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품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요약된 소설과 압축된 영화와 후렴만 있는 음악은 심장에 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

꼭 예술로 뮌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론은 타당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이 된다.
바라건대 진심으로 경청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판단을 잠시 멈추는 사람들의 세계, 상대방의 삶에 자신의 상을 욱여넣으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복잡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세계. 세 줄 요약만 듣고 홀연히 사라지지 않는 이들의 장황한 말을 듣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물화되지 않는 소중한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므로 우리는 고전 다이제스트와 '절말 포함 줄거리'와 '후럼구 모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다못해 친구의 말조차 세 시간 이상 듣는 일이 적은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예술 경험일 것이다.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혼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수전 손택의 그 유명한 말대로 사진을 찍는shoot 일은 총을 쏘는shoot 일과 같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전혀 본 적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절대 가질 수 없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그것도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어떤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내 마음대로 사각형의 모습으로 재단하는 일을 멈춘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담아두고 싶다는 큰 욕망보다 내 삶만을 복기하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상한 타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던가?

내가 세상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반대로 나를 완전히 비우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폭력적이지 많은 진실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인물을 채우는 일에 지쳐 연기로부터 떠난 사람을 알고 있다. 완전한 이해 역시 "살인의 승화"일 수 있다. 아까와는 반대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공감은 나와 타인이 분리되어 있고, 상대방이 적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의식 상태- 최소한 상대방이 무생물은 아니어야 하니까 -를 지니고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완전히 이해받길 원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죽이고 완전히 타인에게 공감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자기계발서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자기계발서가 홀로 닫힌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 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 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 말 것. 부정하지 말 것. 속삭이지 말 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이런 입장을 패배주의라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건 다 배부른 소리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그 모두에는 당연하게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사회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도, 배를 곯는데 노래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도 타당하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타당한 그만큼 삶은 노래해야 한다는 말 역시 타당하다. 삶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말도,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또한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어코 혼자 올라가야 하는가? 만약 모두가 죽도록 힘들지 않아도 아무도 배를 곯지 않고 다 같이 노래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을 지지할 텐가? 이 말이 불온하게 느껴진다면 그는 그 누구보다 지금 이곳에 강력히 뿌리내린 자다.

'고향 없는 인간'. <책의 말들>의 에필로그에도 썼듯 나는 땅에 발붙이지 않은 모든 이를 스승으로 여긴다. 고향이 없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처한 세계를 뒤집어보는 사람, 그래서 오로지 인간과 지구에게 더 나은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뒤를 한 걸음 뒤에서 따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라고 말하는 책보다 나를 멀리 데려가는 책을 원한다. 내가 아닌 사람,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때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그래서 나의 오래된 시야도 생각도 감각도 재편해주기를.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겪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해주기를.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실제로도 이곳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과 100년여의 변화를 통해 질서 지어진 세계이며, 나의 생각은 불과 30년여의 경험을 통해 구성된 산물이다. 삶의 근본적인 조건은 한 번도 당연했던 적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눈앞에 닥친 기후 위기를 목격하는 중이니 머지않아 또 다른 질서를 만들거나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아무도 그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 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지평은 너르게 펼쳐져 있다. 과거의 누군가가 시도해본 삶. 지금의 누군가가 상상하는 세계.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언젠가의 어딘가. 책 속의 그 무한한 감정과, 도시와, 길과, 본 적 없는 신체와 오래된 시와 슬픈 미래의 기억들... 그리고 아마 우리는 폭염과 태풍과 폭우와 해수면 상승을 향해 가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세게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한 조언보다는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재난과 불안한 시국에서 서로를 믿기, 인내하기, 발맞추어 걸어가기.

책들 사이에서 왜 방황하는가? 왜 어떤 책을 집어 들다 말고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가는가?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나'가 아닌 모든 것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다가올 세상과 모르는 감정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될지 저런 사람이 될지 이런 세계에 방문할지 저런 삶에 틈입당해볼지를 고민하고 고민하며 하루의 1/48가량을 기꺼이 쓴다. 그중 어떤 책도 한 권으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한 권이 다른 모든 책을 장악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책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불완전한 상상의 파편들 중 하나를 최선을 다해 고른다.

완전한 최후의 한 권을 찾는 사람에게 책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매체다. 한 권의 책이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라"고 말할 때 다른 어떤 책은 "인간이라면 저렇게 살라"고 주문한다. 둘은 책의 세계에서 맞부딪힌다. 인생에 한 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유일한 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삶에 최후의 정답이 없는 만큼이나 책에도 최후의 성배란 없다(물론 최후의 성배로서의 책이 존재하는 세계를 다룬 책은 있다).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맞부딪히는 주문 속에서 "인간이라면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라"라는 주문은 유일하게 힘을 잃는 주문이 된다.

완벽한 삶이란 없듯이 완벽한 책이란 없으며 그렇기에 닫힌 삶/책이란 없고 우리는 늘 다음 삶/책을 지나쳐갈 뿐이다. 내일의 삶/책, 그다음의 삶/책, 다가오는 삶/책들을 그때그때 파도 타듯 넘어서면서, 예기치 않은 바닷물을 기꺼이 꿀꺽꿀꺽 마시면서. 누구의 삶에서나 남은 시간은 늘 줄어들고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삶/책을 받아들이며 열린 세계의 자녀로 남아야만 한다. 마음의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그리는 과정의 한중간으로서.

어쩌면 그 과정에서 몇 권의 자기계발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위험 속에서 다른 이를 배려하는 법,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법, 살아남으며 존엄을 지키는 방법, 서로에게 친절을 유지하는 방법...

 

스무 살 이후의 삶은 흔한 표현을 빌려 '덤으로 주어진 삶'이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므로 미래를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10여 년의 시간을 빠져나가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껍데기에 삶을 바치지 말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삶을 지켜낼 것.

여기서의 삶은 과정으로서의 삶, 매일의 시간, 바로 그것이다. 어딘가 깃발을 꽂아놓고 그리를 향해 달려가느라 도달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다음 몇 초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때에 있으므로 매 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삶, 내가 아닌 부분을 줄여나가고 나인 부분을 늘려나가는 삶,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 삶을 살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매일 또렷이 바라보며 묻는다. 무엇을 원하는가? (스무살) 읽고 씀으로써 살아남고 싶다. (스물다섯 살) 읽고 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서른 살) 읽고 쓰며 인간의 생각의 집에 속한 아주 작은 티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읽고 쓴다.  (중략) 무엇을 원하는가? 인류가 쌓아 올린 생각의 벽돌에 작은 티끌로 남고 싶다. 철학의 황홀경 속에서 살자. 무엇을 원하는가? 사람들이 덜 고통받기를 원한다. 후원처를 늘리고 고기를 먹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가? 죽음 앞에서 진짜 벌거벗은 사람이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원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정면으로 서는 것이 내가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치 운동선수처럼 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했다. 매일매일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핵심을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나의 전문가'가 되었을 때 나는 반쪽자리 삶을 가까스로 살게 되었다.

이십 대를 마치며 기운을 차리고 알게 됐다. 반쪽을 건졌다고 해서 '남의 전문가' 구역을 삶에서 도려내거나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삶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 안에는 수없이 많은 책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으나 내가 분유받은 살아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뚝 떼어다 나눠 주곤 하는데, 그렇게 나눠 받은 사람들의 합이 자기 안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내 안의 목소리는 작고 빈약하다. 내 안의 목소리는 겨우 두어 명 치밖에 안 된다. 다가오는 고통과 비명 앞에서 대차게 호통을 쳐줄 목소리가 그뿐이라, 지겨운 내 목소리를 크게 크게 내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목소리 안에 무수한 책의 목소리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목소리.

 

하지만 몸은 늘 그런 식이다. 세포는 계속 죽고 태어난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된다. 하루에 3300억 개가 교체되고, 한두 해 정도가 지나면 몸 대부분의 세포가 교체된다. 나는 차곡차곡 바꿔온 나의 세포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것들은 결단코 나지만, '나'는 조금씩 바뀌어왔다. 이 '나'는 저 '나'를 향해 착실하게 항해해왔다.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김겨울, 유튜브로 책 권하는 법, 유유, 2019). "계속 무마해 보겠습니다." 무마의 약속은 곧 도전의 약속이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아침 식사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충만의 시간이다. 과일이며 빵이며 하는 간단한 것들을 준비해 책상에 앉는다. 독서대에 끼워놓은 잡지를 책상 위에 올린다. 한 입씩 천천히 먹으며 새로운 것들을 머릿속에 넣는다. 과학 잡지일 때도 있고 철학 잡지일 때도 페미니즘 잡지일 때도 책에 대한 잡지일 때도 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죽음이다. 천천히 먹는다. 음식도 글도 차근차근 머릿속에 넣는다. 아침 바람이 깨운 정신에는 글이 잘도 들어간다. 밤새 굵주리고 허기졌던 몸과 정신이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다. 익숙하고 지겨운 생각이 신나게 박살 난다. 나는 몇 개의 구절을 두세 번 되뇌며 빼먹은 재료 같은 것을 찬장에서 꺼내 온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삶을 두러워하는 사람은 이미 거의 죽은 상태다."" 근사한 철학자들의 문장을 오물오물 씹어본다. 나는 거의 죽어 있나?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았으므로 매일 아침 '작은 죽음'에서 깨어나는 일을 축하할 수 있다. 무사히 깨어났고 깨어난 것에 비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성공적인 부활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비탄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에 대해 잘알고 있다. 아침을 사랑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축하 만찬은 한 시간가량 이어진다.

 

마지막 아침 식사가 언제일지 가능해본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축하 만찬은 1만 8천 번 정도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리지 않고 가만히 늙는다면 1만 8천 번 정도는 작은 부활을 축하할 수 있다. 많으면 2만 번 정도 될 테지만 그 정도의 축하는 필요하지 않다. 그보다 짧게 잡는다면 한없이 짧아질 수도 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아침 식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내가 죽음에 다가갈 수도 있다. 아직은 모를 일이다. '작은 죽음'이 아니라 '큰 죽음' 그러니까 유일한 죽음이 다가오면 지체 없이 맞이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는 아침의 찬 바람이 깨운 서늘하고 명징한 정신이었으면 한다. 매일같이 축하한 작은 부활의 순간처럼 날카로웠으면 한다. 죽음 앞에서마저 미몽에 사로잠혀 있지 않았으면 한다. 무너지게 될까. 포기하게 될까. 신체의 고통 앞에서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어지게 될까. 나는 이토록 허약한데.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완벽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로 한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라고도 생각한다.

다 먹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오늘도 기어코 몸에 연료를 공급하고 정신을 깨웠다. 이 풍요로운 만찬에 어울리는 하루를 준비해본다. 바짝 깬 정신으로 죽기 전 해야할 일들이 있다. 약속들은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웃으며 하나씩 악수한다. 아, 그거면 됐어. 그거면 됐다.

 

"이제 누가 책을 읽냐"는, 조롱조지만 진지한 장문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요지는 학생들의 말과 같았다.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재미는 굳이 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는 것. 책을 읽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다. 책만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 독서 캠프의 강연장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의 일관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적어도 수 시간에서 수 주에 이르기까지, 흐름과 논리를 따라가며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강연을 가도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다. 수 시간은커녕 수십 분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경험이니까. 하지만 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아니, 책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그걸 안다. 

 

경계에 머무르는 즐거움

 

MBTI 척도에서의 J와 P가 상당 부분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니까 J는 계획형이고 P가 즉흥형이라는, 원래의 MBTI 척도(J는 판단, P는 인식이라는 지표로, 엄밀히 말하면 의사결정에 있어 판단을 선호하느냐 인식을 선호하느냐의 차이로 구분된다고 한다)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을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즉흥적이라는 말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MBTI는 책임감을 측정하는 척도가 아니며 게으름이나 성취도를 측정하는 척도도 아니다. 그저 (통용되는 의미에 따르면) 계획을 세우는 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편에 가깝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답일 뿐이다. 나는 계획 세우는 걸 귀찮아하고 일을 종종 미루지만 일에 대한 책임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마감을 기요틴처럼 여긴다. 여행 계획이라고는 '첫째 날: 동부/ 둘째 날: 서부/ 셋째 날: 남부' 정도밖에 없고 뜬금없이 하루종일 위키백과를 읽는 데에 시간을 다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답이 없는 게으름뱅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테 고3은 내가 유일하게 J로 살았던 시기였다. 과목별 1년 계획을 세우고, 그걸 쪼개서 분기별 계획. 그걸 쪼개서 월벌 계획, 그걸 쪼개서 주별 계획을 세운 뒤에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다시 그걸 쪼개서 일별 계획을 세웠다. 혹시나 계획을 못 지킬 때를 대비해 '못 한 거 하는 시간'까지 잡아뒀다. 그날의 투두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면서 공부를 했고 하루가 끝나면 오늘의 성취도와 공부 시간을 스스로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감상: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수능 보고 나서 스터디 플래너랑 과목별 취약 영역 복습 계획 정리해둔 파일을 불태우고 싶었는데 1년 동안 애쓴 걸 존중해서 살려는 줬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그럼게 산 적이 없지만, 글쎄, MBTI라는 게 환경에 따라 바뀐다는 걸 감안하면 취업을 해서 '회사에서만 J인 사람'으로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판단보다는 이해의 도구로 MBTI가 쓰였으면 한다.

 

에밀 길렐스와 베토벤과 하이페츠와 사라 장에게 학창 시절의 일부를 빚지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면서 그땐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벽(기대앉을 수 있는 거대한 벽)의 작은 무늬들을 살펴보게 됐다. 수백 년간 소리의 세공사들이 빚어낸 형태가 조각보처럼 모여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소리의 형태가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벽을 더듬다 보면 왠지 언어도 시간도 세월도 아주 오랫동안 초월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멜키아데스처럼 조용히, 잊힐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짜고 기워도 더 이상 촘촘해지지 않는 언어의 체를 내려놓은 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길 때 질문이 자라난다.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자: 땅은 사고팔 수 없다. 인간은 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자연은 변형할 수 없다. 동물은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네 가지 명제 모두 하나같이 불온한 명제들이다. 아니 어떻게 감히 이런 생각을? 고개를 살짝 끄덕인 사람도, 화들짝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어느 부분도 당연하지 않다. 저 각각의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끈질긴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저 명제들에 질문할 기회를 놓치며 살아간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달리기는 내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하는 경계를 뚜렷하게 알려준다. 내가 이끌고 다녀야 하는 무게를 정확하게 각인시킨다. 코어 근육이 얼마나 단단해져 있는지.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의 상태는 어떤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발을 들어서 옮기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계속 뛰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결코 계속 뛸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는 지금 당장 멈출 수도 있지만 계속 뛸 수도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이 차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오로지 나만이 느리게 뛸지 걸을지 멈출지 결정할 수 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것 역시. 매번 나를 새롭게 알아가고 동네의 풍경을 알아간다. 내가 나를 들고 뛰기. 왠지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advent calender

 

 - 김겨울, 겨울의 언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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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

진입로 끝에 길쭉하고 하얀 집과 가지가 땅에 끌리는 나무들이 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잠시 마당을 바라보더니 비 이야기를 한다. 비가 너무 적게 왔다, 밭에 비가 좀 내려야 한다, 킬머크리지 신부님이 오늘 아침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에 아빠가 침을 뱉고, 대화는 다시 소의 가격, 유럽경제 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흐른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

길쭉한 물잔에 꽂힌 길쭉한 프랑스국화는 물잔만큼이나 고요하다.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은 없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들, 버터 만들기, 저녁 식사, 씻기고 깨워서 성당이나 학교에 갈 채비시키기,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 밭을 갈고 일굴 일꾼 부르기, 돈 아껴 쓰기, 알람 맞추기.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른다.

2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줄지어 자라는 채소들, 빨갛고 뾰족뽀족한 달리아, 부리에 뭔가를 물고서 천천히 두 조각을 낸 다음 한 조각, 또 한 조각을 먹는 까마귀.

"넌 너무 어려서 아직 모를 뿐이야."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언제나처럼 모르는 일은 모르는 채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ㅇ니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3. 
아주머니는 뭐든 자르는 것을, 문질러 씻고 깔끔하게 만드는 것을, 그리고 물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토스트를 맡기고 그릴에 불을 붙여주더니 한쪽 면이 갈색이 되면 뒤집어야 한다면서 시범을 보인다. 내가 생전 토스트를 구워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내가 일을 똑바로 하길 바라고, 나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거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위타빅스를 하나 주고 하나 더 주더니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마른 나무껍질에서 날 듯한 맛이 약간 나지만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아주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기쁘기 때문이다. 나는 아홉 시 뉴스에서 죽은 단식 투쟁가의 어머니, 폭동, 아일랜드 수상, 아프리카의 외국인들, 기아, 마지막으로 일기예보가 흘러나오는 동안 위타빅스를 총 다섯 개 먹는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날씨가 또 맑을 거라고 한다. 아주머니는 뉴스를 보는 내내 나를 무릎에 앉히고 내 맨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진다.
"발가락이 길고 멋지구나." 아주머니가 말한다. "멋진 발이야."

5.
킨셀라 아저씨의 시선이 어딘가 흔들리고 있다. 아저씨의 마음속 저 안쪽에서 커다란 문제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아저씨는 자기가 한 말의 파도에 갇혀서 거기 그대로 서 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잔돈 소리, 자동차와 두 사람의 대화를 향해 돌진하는 바람 소리,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앞좌석에서 나누는 동강난 소식들에 귀를 기울인다.

걸어가는 내내 꽃이 핀 키 큰 관목과 높다란 나무 사이로 바람이 거세게 불다가, 가볍게 불다가, 다시 거세게 분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7.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8.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은 글로 분위기나 감정을 오히려 정확하게 전달하는 클레어 키건은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며 "애써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의 지력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맡겨진 소녀(Fost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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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가장 나쁜 점은 삶의 내용인 시간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어떤 트렌스젠더 청소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수술 후로 미루며 일상을 유예한다. 어떤 지방대생은 명문대 편입에 성공한 후에 시작될 '진정한' 대학생활을 꿈꾸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다. 어떤 여성은 다이어트, 성형 등을 통해 아름다워진 후에 세상에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다. 사회적 약자는 정상성을 획득한 후에야 '남들 같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으며 현재를 무한히 유예하는 사람들이다.

페이스북의 시초는 '페이스매시facemash'라는 사이트다.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대학 학생들의 외모를 평가할 목적으로 사이트를 만들었다. 패이스매시에 접속하면 두 학생의 사진이 나란히 뜨고, 이용자는 둘 중 더 'hot'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투표 결과에 따라 학생들의 외모 순위가 매겨졌다. 이 사이트는 하룻밤 사이 약 5,000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후에 주커버그는 보안 위반, 저작권 침해, 개인의 사생활 침해 등을 이유로 하버드대학 행정위원회에 기소되었지만 징계나 처분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후에 그는 이 사이트에서 있었던 경험을 발전시켜 페이스북을 창립했다. 2018년에 있었던 페이스북 청문회에서 페이스매시의 성차별성이 다시 한 번 조명되며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탈코르셋은 나, 관계, 미래,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전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성은 왜 당연히 화장을 하는가?'라고 물었을 뿐임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전제까지 다시 물었"던 것이다.  / 이민경, '탈코르셋', 한겨레출판, 2019 재인용

인스타그램에서는 여전히 성차별을 증명하라는 질문을 벗어나기 어렵다. 마치 수학 교과서에서 '집합' 단원만 까만 것처럼, 여성들은 매번 첫 페이지로 돌아가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다는 통계와 성폭력 사건에 관한 뉴스를 공유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주변인을 기다려주고 이해시키고 함께 성장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페미니즘 논의를 늘 입문 수준에 머물게 할 수도 있다. 현재 상황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아가게 하기보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들이 공부한 것을 '리셋'하게 해 수준을 낮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하다보면 페미니즘은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포장해야 하는 브랜딩의 대상이 되고 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식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 상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사람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면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낯섦과 불쾌함이 앎의 시작이다. 그런데 상대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셀카를 보정하듯 페미니즘을 보정하게 된다. 페미니즘에서 급진적이거나 우둘투둘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매끈한 부분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성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은 보정을 거쳐 정상성을 승인받고자 하는 대상으로 협소해진다.
문제는 인스타그램에서 페미니즘이 정치성을 상실했음에도 여성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소재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성들은 '확실한' 불이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거나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은 많지 않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개인은 운동에 기여하거나 헌신한다고 느끼기 쉽다. 실제적인 변화의 폭에 비해 여성들이 소진되는 정도가 너무나 큰 기이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페미니즘은 무엇을 하려는지보다 페미니즘이라는 어려운 소재를 꺼내는 개인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생긴다. 사회정의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페미니즘 사상은 페미니즘이라는 텅 빈 이름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공허한 투쟁으로 남기 쉽다.

인스타그램의 모든 기능은 이용자가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즉각적인 보상을 획득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용자와 계정이 1대 1 관계를 맺고 있어 발화자에게 이목이 쏠린다. 피드가 계정주의 '온라인 생애'를 한눈에 보여주는 포트폴리오로 기능하며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준다. 다양한 집단군의 사람을 한꺼번에 대면한다. 계정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팔로워 수'를 통해 타인의 반응과 관계 변동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 자신이 연출한 이미지가 타인에게 통했는지 매 순간 '좋아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가 해시태그를 통해 게시글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 김지효, 인생샷 뒤의 여자들, 오월의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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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에서 검사 류승범이 내뱉는 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가 곱창집 사태를 압축하는 표현처럼 사용됐다. 이후, 권력관계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가 등장했다. 이 내러티브의 큰 줄기는 약자가 피해자 위치를 이용해 강자에게 부당 이익을 얻는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권리를 가질 권리' 란 제도상에서 권리를 주장할 역랑조차 없는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권리를 가질 권리'는 용산 참사에서 제일 두드러진 개념이었다.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던 시민들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4년 만에 '권리를 가질 권리'나 '인권'에 대해 우리 시민들은 냉담한 눈빛을 보냈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
야 된다고, 그것이 염치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노조 결성의 자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웅호하던 시민들은 마음이 급속도로 식은 연인처럼 냉담한 태도로 자유의 의미를 뒤집어 버렸다.
자유가 뒤집어진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반성을 요구하게 만드는 걸까? 앞서 검토했듯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였다. 교과서나 정치학 이론서에 존재하던 '자유'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생생히 구현됐다. 트랜스젠더 하리수와 동양인 최초의 폴레이보이 모델 이승희가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한국 힙합과 조선 평크가 홍대 앞에서 나름의 하위문화를 구현했다. 이뿐만 아니라 '안티 조선 운동'이 개시되며 기성 언론이 점유하던 '미디어' 환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국민의 정부 자문 위원으로 환동하던 최장집 교수를 사회주의자로 낙인쩍고 공개적으로 마녀사냥했다. 최장집의 박사 논문에서 김일성에 관한 대목만을 발췌해 악의적으로 편집, 논문 전체를 종북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시민사회는 절독, 기고 보이콧 등 다양한 형태의 '안티 조선'을 언론 운동으로 만들었다. 시민 사회가 조선일보의 중북몰이를 악으로 규정한 데에는 조선일보가 표방하는 극우 정체성을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 종북몰이에 동반하는 사실 날조와 맥락 왜곡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진중권은 조선일보 '독자 마당'(조독마)에서 '밤의 주필'로 필명을 날렸고, 조갑제의 박정희 평전 <내 무덤에 침을 밸어라>를 패러디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통해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를 풍자했다. 문화 연구 역시 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 일상의 자유를 노래했다. 성 정치, 포르노그래피 등을 위시한 새로운 주제들이 문화 연구에 홀러 들어왔다. 자유를 노래하던 2000년대의 마지막은 용산 참사를 비롯, 홍대 청소 노동자 농성처럼 인권과 평등을 위한 자유, 다시 말해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자유로 장식되었다. 2010년대는 달랐다. 자유는 재산권을 행사할 자유로, 시장의 자유로, 기업의 자유로, 국가 폭력의 자유로 전환되었다. 여기에서 기이한 점은 2010년대의 자유라는 '관점'이 조금은 기이한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이전과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던 것도 이 무렵이다. '세월호' 비극에서 시민들은 단원고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국가를 비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학생들이 탑승한 세월호의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도 눈에 띄었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는 오랜 기간 저항의 대상이었다. 2010년대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보모국가'(nanny state)로 변신했다. 2016년 필리버스터라는 장관을 낳은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은 국민의 개인 정보를 테러를 방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테러방지법은 국가가 보모의 역할을 자임하며 보호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404)

누군가는 어떤 것이 기이하냐고 묻는다. 대답은 이렇다. 2000년대에서 2010년대로 이동하며 자유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훔칠 수 있는 자유'가 '지켜야 하는 자유'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음악, 영화, 프로그램을 토렌트 같은 P2P 프로그램으로 다운받는 일은 마치 공기의 존재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금연 구역에서 흡연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많은 흡연자들은 금연 구역을 이용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2010년대 전후로 정부와 지자체가 실제 거리 단속을 강화하고 강력한 수준의 법제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많은 흡연자들은 금연 구역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물 내에서 아무렁게나 담배를 피우며 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금연 구역 스티커가 붙은 곳에 널려 있는 담배는 일상생활 곳곳이 불법적 자유의 존재를 상징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불법적 행위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의 편익을 도모하려는 데서 발생한다. 즉 '개인 행위자' 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유가 중요하다. 내가 '개인으로서' 갖고 있는 성적 자기 결정권, 노동자로서 갖고 있는 권리는 침해당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내가 '자유'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었다. 우리가 자유에서 떠올리는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반면 2010년대에 시민들은 자유를 대하는 데 있어 여태까지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우장창창' 사태에서 세입자가 아닌 '건물주'의 자유를 옹호했고, 보행자가 아니라 운전자의 자유에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괴기하다고까지 할 현상이었다. 우리는 내가 언제나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해 다소 부당할지라도 '개인적 층위'의 자유를 활용했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나보다 휠씬 거대한 '기업', '건물주', '국가'의 관점에서 자유를 파악하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 단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영화평론가 지우베르투 페레즈는 예술에서 '스케일'의 차이는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유발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물리법칙은 규모에 무관심하지 않다. 어떤 세계보다 두 배 큰 세계는 크기만 두 배고 똑같은 세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세계다. 예술에서도 규모는 차이를 만든다. 여전히 사진은 삶보다 작다. 영화 화면은 삶보다 크다. (중략)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에서 영화를 보는 경향은 더 이상 우리가 들어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들여다보며 엿볼 수 있는 세계로 영화의 변화된 경험을 만든다." 규모와 범위가 달라지면, 똑같은 개념이라도 더 이상 같지 않다. 우리는 짚신벌레의 눈으로 코끼리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중략) 제프리 웨스트는 "어떤 구조물이든 그 크기를 임의로 키운다면 그 자체의 무게로 결국 무너질 것이다. 크기와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단언한다. 2010년대 들어 사람들의 눈에 밟히는 자유는 일반적인 시민이 견디기에 대단히 거대한 크기다. 어떻게 개인이 기업의 자유에 대해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일반 시민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기업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바라보는 관점에 무엇인가 오류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중략)
2010년대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관측하는 척도에 돌이킬 수 없는 오류가 일어났던 시대였다.

앞서 스웨덴 정부는 저작권 보호 강화를 위해 사적 이용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자료 공유조차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영화협회(MPAA) 고발조치에 따른 결과였다. 한국이었다면, 이러한 규제가 이뤄지는 데 왈가왈부가 있더라도, 시민들이 군말 없이 따랐을 가능성이 높지만, 스웨덴은 달랐다. 2006년 해적질을 정당화하는 사이트인 '해적당'이 출범하고, 뒤를 이어 '해적당' 이라는 정당도 결성된다. 속전속결이었다. 2009년 해적만 압수수색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오고, 해적당의 인기가 폭등하면서 유럽 의회에서 7.13%의 득표율을 기록해 두 자리의 의석을 차지했다. 해적당은 '저작권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중개하는 기업'의 권리를 부정한다. 창작물은 오롯이 저자에 철저히 속해야 한다. 그러한 창작물에 대한 비영리 목적의 공유는 그것이 기업에 독점적인 형태로 귀속되었을 때보다 사회에 더 큰 이익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모스에 따르면 특정 사물에 대한 권한이 한 소유주에서 또 다른 소유주로 이전되는 데서 사물은 원래의 소유주로부터 '소외' 되고 만다.* 벼를 재배했던 농민의 손에서 떠난 쌀을 생각해 보자. 중간 유통 도매상들은 쌀을 유통시킨다. 쌀은 소매 시장으로 들어가 특정 브랜드의 상품이 된다. 쌀을 처음 재배한 농민은 까맣게 잊히고 만다. '해적당'이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해적당은 저작물이 원 창작자의 손을 떠나 대기업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는 현상을 비판했다. 모스가 말하는 '소외'는 오늘날의 사회에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창작자와 청취자의 분리를 더욱 심화시키는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임시적인 유토피아는 '증여'에 기반한 이용자들 간에 가상의 계약을 성립시킨다. 불법적 유토피아 속에서 이용자들은 소외에서 잠시 벗어나 찰나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이 자유야말로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나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대면시켜 준다.

2010년대에 무명 음악가들은 오랫동안 암흑 속에 누워 있다 갑작스레 깨어났다. 루이스는 앨범을 사비로 내고는 여느 무명 가수들이 그렇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지하 속에 묻혀 있던 루이스의 이름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음반 수집가 존 머피가 벼록시장에서 루이스의 앨범을 그야말로 우연히 구입해 듣고는, 음악 블로그를 운영하는 친구인 위어드 캐나다(Weird canada)에게 소개했다. 루이스의 앨범은 위어드 캐나다에서 소개되며 큰 호응을 원었다. 루이스의 음악은 <피치포크> 같은 대형 음악 웹진에도 소개된다. 루이스의 음반은 재발매되며 그의 음악은 부활에 성공한다. 2010년대 전자음악계에서 가장 주목 받은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같은 음악가가 루이스와 협연을 목표할 정도였으니, 루이스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다. 과거에 파묻혀 있던 뮤지션의 부활은 인터넷 시대에는 기적이 아니었다.
음악 플랫폼이 청취자의 듣기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알고리즘'은 음악의 미적인 가치를 사용가치로 전환했다. 실제로 우리는 음악을 기능별로 구획 짓는 수많은 해시태그를 볼 수 있다. '잘 때 듣는 음악', '쉴 때 듣는 음악', '공부할 때 듣는 음악' 이런 알고리즘이야말로 자신의 취향을 형성하려고 온갖 음악을 테스팅했던 청취자의 역량을 빼앗는 일 아닐까? 취향을 형성해 나가는 '나'는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르는 '소비자'로 변신했다. 2010년대에 청취자가 음악을 듣는 범위는 줄어들지 않았을지 몰라도 음악을 찾아 듣는 '자유의지'의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까?
*Baldr Eldursson, "2010s: The End of Anarchy", Tiny Mix Tapes, November 12, 2019.

탈레브에 따르면 금융 위기는 검은 백조였다. 금융 위기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균열이 일어났음에도, 이는 우리 행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미래를 판단하고 행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흰 백조만을 상상할 뿐이다.
이는 비단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고, 우리 시대에 보편적인 현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은 '유토피아' 였다. 이런 유토피아는 자유와 공유, 개인을 각각 항으로 둔 방정식이다. 이 독특한 방정식에서 개인은 '유저', '이용자', '피어(peer)'라는 이름으로 '해적질'할 자유를 누린다. 이러한 자유는 다른 '피어'를 공범으로 만드는 공유 행위를 통해 더 널리 퍼진다. 그로 인해 이 임시적인 유토피아는 해적질이라는 범죄에 가담한다. 범죄자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상의 국가가 있다면, 우리는 범죄자와 일반 시민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터다. 이런 유토피아가 플랫폼 대기업에 의해 점점 잠식되는 장면이 2010년대의 주요한 흐름이었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다. 스마트폰 없이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음악 창작도 마찬가지로, 음악 창작 '소프트웨어'가 음악 창작의 자유를 오히려 제약한다는 주장도 찾아볼 수 있다. 군산 복합체가 발명한 컴퓨터는 인간의 인지 프로세스를 모방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소프트웨어의 명령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데이터 분석 회사가 페이스북 앱을 통해 수백만 명의 개인 정보를 정치 캠페인에 활용했다는 점이 언론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컴퓨팅'이라는 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한다는 주장을 새삼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트릭스]부터 메타버스까지 장장 30여 년간 그런 주장은 사회의 주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컴퓨터가 '자유'의 개념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알고리즘과 AI가 우리의 취향을 배열하는 걸 넘어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를 이미 간파했다는 걸 의미한다. 반복하자면 히어로 영화의 악당처럼 페이스북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알고리즘을 거쳐 개인 정보를 획득할 뿐 아니라, 개인이 생각하는 방식을 편향시키려고 했던 시도는 여기저기서 관찰되었다. 심지어 페이스북은 감정도 전염되는지를 실험한 사실과 투표율과 장기 기증률을 증가시켰다는 사실을 홍보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로서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임시적 자유의 공간으로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레이버는 '국가' 없이도 작동하는 공동체로 마다가스카르에 속한 이메리나 지역을 사례로 든다.

그래서, 지금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자유인가. 조지 레이코프는 진보주의가 자유를 보수주의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먼저 레이코프는 자유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본다. 레이코프가 제시하는 프레임은 '국가'를 가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진보주의는 국가를 자애로운 부모로 보며, 보수주의는 국가를 엄격한 아버지로 간주한다. 이 프레임의 차이로 인해 권리, 인권, 정의에 대한 관짐에서 상이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통념상, 자애로운 부모는 감정이입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창을 갖게 된다. 때문에 약자의 입장에 서서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우가 혼한 것이다. 반대로 엄격한 가부장의 상을 취하는 보수주의자는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자유를 바라본다. 기회의 자유, 자유시장 등 이 자유는,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하면 떠올리는 완고한 보수의 입장이 투영됐다. 자유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영역을 관통하는 의미의 집합이라면, 자유의 의미를 변경하는 프레임을 제시하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레이코프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뒤바뀐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자유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누가 뭐래도 소비자 의식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집트인처럼 어느새 돈을 사랑하는 민족이 됐다는 한국인의 자기비하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근래 퓨 리서치센터에서 진행한 조사에서 한국인만이 유일하게 삶의 최우선순위에 물질적 풍요를 뒷다는 결과가 알려지며, 다시 한번 자성의 요구가 일었다. 하지만 소비자주의는 우리의 삶에 침윤한 지 오래다. 사회민주주의와 공동체주의를 해독제로 주장하는 한국적 진보의 풍토는 너무나도 친숙하다. 이미 자유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책략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위한 프레임을 세밀히 살피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바로 소비자이고, 소비자는 왕이라는 의식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소비행위가 경제 생활의 층위뿐 아니라, 일상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의 형태에도 영항을 준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된다. 내가 나의 취향을 형성하기 위해 불법이라도 저지르겠다는 '자유'는 내가 나를 만든다는 자기의식과 연동되었다. 반면 2010년대에 플랫폼을 취사선택해 알고리즘에 취향을 맡기겠다는 점은 괜찮은 서비스를 선택하겠다는 표현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소비자주의에 머물지 않고, 내가 '타자'를 맞닥트리는 태도도 조정하는데, 그것은 전도된 '주인 의식'으로 이어진다.
OTT를 활용하면 우리가 취향을 형성하려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필요가 없듯, 우리는 타인을 마주하고 그들과 공동체를 만드는 데 따르는 다양한 갈등을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을지 모른다. OTT의 이용자가 영화나 작품을 맞닥트리는 대신에 플랫폼을 마주하듯, 우리는 이웃과 직장, 공동체 대신에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한 정체성으로 홀쩍 감정이입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나'의 취향을, 아니 나 자신을 만들 동안에 우리는 마치 플랫폼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소비자주의는 그저 소비 행위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인식하는 '자아'의 관점에 오류를 발생시킨다. 자신에게 충분히 긴 지렛대를 주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는 아르키메테스의 단언은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비유다. 우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일 기업이나, 국가, 시장의 자유로 무엇을 들고 있을까? 동시대의 불행에 대해 캐물었던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서울 도심과 아프리카의 지리적 거리, 한국인과 소말리아인의 인종적 거리, 혹은 도시인과 화물선 선원의 계층적 거리, 그리고 해적이라는 얼마간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기호(한 인디 레이블은 '해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가 빚어 내는 비실재감이라는 심리적 거리 등등. 이 거리들이 한데 모여 더해지거나 곱해질 때, 거기에 그 사건이 나의 생활 반경에 모종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국제정치학적 거리에 대한 판단이 가세할 때, 아덴만 사태는 그것을 원거리 통신 미디어를 통해 바라보는 우리에게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하이퍼리얼한 스펙터클에 가까워진다."

팬덤 문화를 중심에 둔 K-팝의 매력은 전적으로 문화로서의 불구성에서 나온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K-팝이 문화일까. 어떤 문화가 역할 모델이 부재하고, 참여자와 방관자가 철저히 구별되는가. 적어도 록이나 힘합에서 게임에 진입하는 건 플레이어의 자유다. 비틀즈를 비롯해 라디오헤드나 악틱 몽키스 같은 밴드들은 학창 시절에 결성되거나, 동네 친구들로 결성된 경우다. 그들이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가를 꿈꾸게 되고, 또 음악을 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는 친구들 간의 우정이 한몫한다. 한국 힙합에도 리듬파워 같은 인천 출신 그룹, 씨잼이나 비와이 같은 동갑 래퍼들은 모두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낸 동갑내기 친구다. 힙합이나 록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팬은 음악가를 역할모델로 삼는다. 그들처럼 음악을 만드려고 시도하거나, 음악가가 속한 하위문화의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한다. 그러나 K-팝에서는 특정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미성년에서 시작하는) 특정 연령의 개인들이 기획사에 선발된다. K-팝에 자율적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K-팝 산업 전반에 활동하는 (아이돌을 포함한) 음악가들은 기획사가 기획한 '상품'(이 대목에서 어떤 독자들은 아이돌 음악의 상입성을 비난하던 1990년대 록키즘(록 음악 우월주의)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상품으로서 '음악가'를 비난한 목적은 없다.)으로서, 팬들은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K-팝 산업을 구동시키는 행위자들은 철저히 구획된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꿔 말해, 이곳의 소비자들은 산업에 참가해 아이돌로 성장하는 것을 욕망하는 대신에, 아이돌을 오로지 머릿속에서 환영적 대상으로 욕망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이돌을 지망하는 연습생이 산업에 참여한다면, 아이돌 팬덤은 그들을 관찰한다. K-팝 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참여와 관찰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리와 그로 인한 격차와 간격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특징으로부터 성 역할에 대한 다양한 유희가 이뤄진다. 아이돌 팬은 아이돌이 멀리 떨어져 오직 원격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자신과 아이돌의 거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척한다. 그와 동시에 아이돌 팬은 아이돌이 자신의 친구인 것처럼 대하지만, 실상 그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이는 아이돌 팬픽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팬픽 제작자들은 성적인 호감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멤버들을 '커플링'해서 둘 간의 섹스를 상상한다. 가상의 상황 속 아이돌들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성적 쾌락을 느낀다. 직캠과 팬픽 같은 팬덤 문화는 K-팝 산업에서 이뤄지는 분리와 간격에 의한 발명품이고, 그것은 과밀한 K-팝 음악의 미적 특성과 조응한다. 무엇이든지 꽉꽉 채워 넣기 위해 음악적 간격을 두는 것, 자신이 아닌 무엇을 상상하기만 하는 것, 그리고 간격과 거리를 즐기는 것. 이 독특한 거리 감각은 우리 세대가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단위'가 된다.

이자혜 만화 <미지의 세계> 관련

반복하자면, [미지의 세계]에서 친구는 "인터넷 친구" 혹은 "가짜 친구"다. 학창 시절에 만난 진짜 친구, 트위터를 통해 만난 인터넷 친구가 따로 있을진 몰라도, 미지가 저 '친구'들을 통해 획득하려는 것은 동일하다. 그것은 환상이다. 관계성에 목매는 시청자들이 출연자들끼리의 친밀함과 돌봄을 상상하면서 느꼈던 대리만족을 생각하자. 이는 동시대 일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방치형' 게임에서 '대리'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방치형 게임이란 플레이어가 사냥이나 전투를 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플레이어를 대리하는 게임을 의미한다. 플레이어는 자신을 대리하고 있는 유닛들과 연합한다. 미지가 자신의 친구들을 창으로 삼아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가짜 친구들과 함께 세계를 배회한다. '떨어져 있음에도 연결되어 있는' 저 감각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경향이 됐다.

그러나 자신을(자신의 꿈을) 기술하는 것은 자기를 파괴하는 일이다. 스탕달의 말처럼 "일기"란 자살의 일종이다. 자신을 총체적으로 기술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오히려 나를 파괴하고, 나를 밀쳐 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내용은 재밌게도 한국의 밀레니얼세대(MZ세대)의 그것을 진단하는 내용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로스트 제너레이션과 밀레니얼을 관통하는 것은 '전능감'이다. 자신이 외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은 오늘날의 세계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나는 전능감을 유지하는 데 만족감을 느끼며, 이 같은 전능감이 깨질 것을 두려워해 성공과 실패, 과거에 '모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두려워 한다. 그들은 오직 성공도 실패도 아닌 현상 유지에 집착한다. 이는 비단 동아시아 사회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마크 피셔는 영국 학생들에게서 '반성적 무기력' 이라고 부르는 심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기력함을 멈출 동기를 찾지 못하는 탓에 무기력을 유지시키는 우울증의 피드백이다. 이 또한 전능감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반응이다. 사회적 환경을 나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자연' 처럼 간주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연을 바꾸지 못하고, 자연에 적응한다. '전능감'을 유지하려는 전 세계의 청춘들은 그저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 급급하다. 이런 감각이전 세계가 K-콘텐츠에 열광할 수 있게 한 동력이었을 거라고 과감히 추론해 본다. 한국의 드라마와 웹툰, 게임들은 이미 자아가 '대리인'을 거쳐 세계를 마주하는 장면을 어떤 국가보다도 더 생생히 묘사해왔으니까 말이다.

 

 

강덕구, 밀레니얼의 마음,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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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가 능력주의는 자산과 권력, 명예를 세습하는 구(舊)귀족정을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 젊은이가 능력주의에 공감하는 것도 마치 이것이 '금수저'들의 세습 질서를 깨고 '공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능력주의는 그 신봉자들을 철저히 배신한다. 능력주의는 구(舊)귀족정을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인 듯 보이지만, 능력주의가 만들어 놓는 새 질서는 결국 신귀족정이다. 능력이란 항상 학교나 시험 같은 제도들을 통해 육성되고 검증되는데, 이런 제도들은 늘 기득권층에 의해 또 다른 세습의 통로로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는 초기에는 실제로 노동계급이나 하위 중간계급의 자제들 중에 계급, 계층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 세대만 지나도 사정은 달라진다. 이미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이들의 자녀가 다름 아닌 '능력'이라는 명분 아래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고, 능력주의는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세습주의가 된다. 많은 이가 지적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론이 중산충 세습화 현상을 극복하는 데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공정론'은 중산충 세습화 현상을 지탱해 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교육제도에 참여할 기회 자제가 막혀 있던 때에는 당연히 교육 과정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일 따위는 노동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은 대학 졸업장이나 학위, 시험 합격 이력 따위를 줄줄이 매단 엘리트들에게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교육 기회가 열렸다면 고용주나 관리자가 하는 일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에 따르면, "내가 제대로 기회만 있었다면…나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기회가 없었을 뿐이다.…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게 노동자들이 품은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원적인 교육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시험 성적이나 상급학교 진학 여부에 따라 성공한 인생인지 아닌지 평가받는 현실과, 일자리에 따라 부와 권력, 명예가 달라지는 현실이 서로 뒤섞이고 점차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노동계급 자녀 가운데 계층 상승 사다리를 밟는 이들도 적지 않게 생기지만, 훨씬 더 많은 이가 고용주나 관리자의 명령을 받는 자기 처지를 학창 시절의 실패나 태만, 무능력 탓이라 체념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은 부모 세대보다 가방끈이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빼앗겨 버렸다. 빼앗긴 것은 평등 의식의 기반이 된 자부심이다. 대신 새로 얻은 것은 저들은 '잘났고'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당연히 저들이 위에 있고 나는 아래에 있다는 패배감이다. 이것이 영이 예상한 능력주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이 사회는 그 안에서 노동계급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점에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하게 불평등하다. 불평등이 그 피해자들 사이에서 도전이 아니라 체념과 순종의 대상으로 굳어지기가 휠씬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일한 역사적 상황을 전에 없던 기회로 삼으며 이를 누구보다 반기는 집단도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대목에서 영이 잡아낸 능력주의의 핵심이 '지능' 이라는 단일한 기준임에 주목해 보자. 지적 능력이 성공의 발판이 될 경우에 계층 상승의 기회가 넓어지며, 그렇기에 '지능+노력'에 비례하는 보상의 약속을 누구보다 열렬히 믿고 지지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이 집단이야말로 평등의 대의와 능력주의를 일치시키는 다음 같은 문장의 열띤 지지자들일 것이다.

[현재의] 이 무계획적인 오합지졸 민주주의는 민주적 귀족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곧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해하면서 그 신성한 목표를 항한 질주를 이끌 수 있는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되어야 한다.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는 누구인가? 위의 발언을 남긴 버나드 쇼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영의 책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승자로 떠오르는 하위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똘똘한' 자녀들,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 졸업장을 따내고 죽을 때까지 이를 남과 나를 구별하는 영원한 딱지인 양 여기는 이들이다. 능력주의 속 가상 역사에서 이런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 에 해당하는 집단의 특별한 선호나 노력이 없었다면 능력주의는 결코 새로운 불평등 체제로 자리 잡고 발전해 나갈 수 없었다. ---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담지자: 지식 중간계급intellectual middle class (글쓴이가 임의로)

1970년대는 미국 주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고 모순이 폭발하는 시기였으며, 이 위기를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북반구와 남반구가 각각 대안을 내놓으며 대결한 시대였다. 이때 미국 정부와 금융계가 지휘하는 북반구 자본 진영이 추진한 대안들이 승기를 잡았다. 그 대안들이란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의 세 가지 커다란 전환이었으며, 이 전환들이 서로 맞물리며 등장해 지금껏 이어지는 역사적 국면을 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 라 칭하곤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기에 추진된 세 가지 전환은 하나같이 다 신흥 지식 중간계급에게 지위 상승의 기회로 다가왔다.

고임금을 받으며 자기 집을 소유한 지식 중간계급은 주식 시장, 부동산 시장 등등에 뛰어들어 시장 규모를 배가해 주고 불로소득을 확보했다. 고등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국가나 기업의 관료 체계 안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산 시장 참여를 통해 그에 맞는 부를 쌓는 것이 지식 중간계급이 추구하는 '좋은 삶'의 전형이 되었다.

관리자본주의와 지식 중간계급이 능력주의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릴 때에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구실을 한 제3항이 있다. 그 제3항이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왜 능력주의의 전진을 방해했는가? (중략) 노동자들이 능력주의의 필수 전제인 어떤 근본 관념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거나 적어도 동의는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영의 '능력주의 = 지능 + 노력' 등식을 떠올려 보면, 그 근본 관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등식은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능력들을 별 고민 없이 하나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모든 인간을 단 하나의 능력을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지능이라는 단일한 능력이 만능 잣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능력의 유일신교다. 이게 너무 종교적인 비유로 들린다면, 능력의 일원론이라고 하자. 
이런 능력의 일원론에 정반대되는 사고방식은 당연히 능력의 다원론이다. 지능 외에 다른 능력들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당신보다 더 똑똑하니 뭐든 내가 더 위야"라고 아무리 으스대 봐야 소용없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
고, 게다가 숫자까지 많았다. 능력에 관한 한, 생래적 다원론자
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계급을 지식 중간계급과 비교해 보면, 이런 특성이 선명히 드러난다. 지식 중간계급은 능력의 일원론에 동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지능이 관료 조직 진입과 지위 상승의 유일 척도라고 선포되기만 하면, 지식 중간계급은 이를 부와 권력, 위신의 보편적 기준으로까지 격상시키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반면에 노동계급은 오랫동안 이를 시큰둥하게 쳐다보거나 못마땅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력에 맞서 다른 어떤 육체적 능력울 대안적인 유일 기준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유식한 척하거나 가방끈이 길어야 더 잘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따름이다.
자본가, 관리자, 정치인, 대학교수가 뭐라 떠들든 그들은 '제대로 사는 삶'에 대한 그들만의 생각이 있었다. 이런 이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능력의 일원론은 오랫동안 신봉자를 더 늘리기 힘들었다. 도무지 설득이 먹히지 않는 집단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능력에 관해 '생래적' 다원론자일 수밖에 없었던 기본적인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다양한 능력의 보유자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력주의를 통해 유일한 '능력'으로 추대될 운명인 지능 혹은 학력과는 어쩔 수 없이 거리가 먼 처지이기도 했다. 우선 노동자들은 아직 기계화 수준이 높지 않은 작업장에서 전통적인 장인 노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자기 직업이 하찮게 여겨지길 원치 않았고, 그러려면 누구보다 그 자신이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했다. 중세 길드 전통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고 어떻게든 직업별 노동조합으로 계승된 경우에 자부심은 더욱 견고했다. 그들은 사장이나 관리직 사원은 절대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될 자기네 '형제'(또는 '자매')들만의 기술과 노하우, 덕성과 미풍양속을 자랑스러워했다. 능력의 만신전을 채울 신들은 결코 수가 부족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 이런 대중정당들 덕택에 노동계급은 지식 세계에서 배제되거나 이에 압도당하지 않은 채 잠시나마 '계몽'의 한 주역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일상은 패배자에게 남은 몫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가진 것과는 종류가 다른 역량과 덕성의 보고가 되곤 했다.

노동계급의 독특한 위상과 이상, 조직,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어떤 무시 못 할 힘의 자장이 구축됐다. 이 자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이 지난 세기 어느 시점까지 견지하던 찬란한 덕목이다. 그들은 주눅 들지 않는 주체였고, 그래서 시민들이 시민 되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불평등을 자신들의 패배가 아니라 저들의 실패라 이해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승리할 집단적 기회를 당당히 요구했다. 현재의 패배자가 아니라 미래의 진정한 승리자로서 말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능력주의 발전의 걸림돌 구실을 하던 형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일련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그 변화의 상당수는 한동안 노동계급의 역사적 성취라 평가받았다. 임금 상승과 복지수당 확충에 따른 대량소비, 이런 구매력 향상에 부응하는 미국식 대중문화 확산 그리고 공교육 시스템 구축 같은 변화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빛나는 성취이면서 동시에 노동계급을 무장해제시키는 치명적인 독 또한 품고 있였다. 가령 우리의 관심사인 공교육 발전은 능력주의 출현의 마지막 빗장을 푸는 계기였음이 드러났다.

주눅 들지 않던 주체가 어느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학교에서 과거와는 다른 성장기를 경험한 세대가 노동계급을 채워 나갈 그 무렵에 이 계급은 전례 없는 세계사적 후퇴와 패배에 내몰리고 있었다. 1970~1980년대에 노동 세력의 모든 성취에 대한 가혹한 공격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앞에서 지식 중간계급에게는 기회가 됐다고 한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 모두가 노동계급에게는 재앙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주식시장의 지배를 받는, 본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기 힘든 기업에 원격 호출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시험의 패배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지구적 계급투쟁의 패배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설상가상으로 노동계급은 과거 세대가 움켜쥐었던 두 무기마저 빼앗기거나 녹슨 형편이다. 이상과 조직 말이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좌파 이넘들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노동조합은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지나간 지금까지 세력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수 노동계급은 선거에서 극우 포풀리즘 세력에 표를 던저 "서민층의 마지막 호소"를 토해 낸다. 그러나 이는 엘리트들에게 예전처럼 두려움과 일말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미 주눅 든 이들의 불평, 불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견제 세력마저 힘을 잃은 상황에서 전 지구적인 능력주의의 질주가 시작됐다.

지식 중간계급의 눈에 비친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들에게 사회란 모든 사람이 정상을 바라보며 힘겹게 올라가는 거대한 사다리다. 노동계급은 '우리'와 '그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사회가 수평적인 무대라는 감각을 완강히 고수하지만, 지식 중간계급은 사람에 따라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는 수직적 사다리를 볼 뿐이다. 이 사다리에서는 계속 위로 올라가지 않는 한은 제자리에 있기보다는 아래로 떨어지기 쉽다. 사다리의 폭이 숨 막힐 정도로 좁다고들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남이 나를 추월하여 어느덧 내가 아래가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를 느끼고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경쟁은 사람들을 부족으로, 가족으로, 개인으로 항상 잘게 나눈다.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부정적인 인상을 부추기는 것 같다. 공평하려면, '우리'와 '그들'의 투쟁이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계급의 사회 관념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점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에 반해 사다리에서 개인들이 치열한 상승 노력을 경주한다는 지식 중간계급의 사회 관념은 휠씬 더 역동적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시장자유주의 교리에 충실해지자 노동계급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반면에 지식 중간계급은 파도를 타며 질주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물론 고학력 피고용자가 중간계급의 다수가 되기 전에도 과거 중간계급은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했다. 작은 농장 혹은 상점이나마 갖고 있던 이들은 꾸준히 자산을 불려서, 이미 멀찍이 앞선 자본가들을 따라잡으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중간계급에 비하면, 이는 미망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지식 중간계급은 학교와 시험 제도뿐만 아니라 관료 조직 안의 승진 시스템을 통해 '상승'의 의미를 휠씬 구체적으로 체감하며, 자산 시장 투자를 통해 재산을 불려 나갈 기회 또한 많아졌다. 인류학자 하다스 바이스의 말처럼, "중산층은 끝없는 능력주의를 상징하며, 투자하는 이들에게는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약속하고 투자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락으로 위협한다. 만족을 미루고, 비축하기 위해 소비를 절제하고, 부채에 따른 책임과 위험을 떠맡고, 교육과 훈런, 집과 저축 상품과 연금에 투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중산충의 상승 전략이자 계급 하락을 예방하기 위한 전략이다." 바이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
중간계급이란 실은 '미래 투자를 통한 계층 상승'의 환상에 사로잡힌 임금 소득자의 일부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달리 말하면, 이 완강한 꿈이 없다면 지식 중간계급도 없다. 그들은 그저 노동계급의 새로운 한 부분이 될 뿐이다.

더구나 능력주의는 부모 세대가 확보한 상위 중간계급 지위를 후대에 세습하는 통로로도 쓸모가 있다. 영의 등식에서 극히 모호한 항목인 '노력'에는 지식 중간계급 가운데서도 상위 계층(고위 관리자나 전문직, 대학교수 등)에 속한 부모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동원하는 각종 자원이 자유롭게 대입될 수 있다. 일찍이 학비가 비싼 사립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다른 계층은 듣도 보도 못한 사교육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도 영의 등식에서는 '노력'이다.

하위 중간계급은 확실히 상위 중간계급만큼은 능력주의를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다수는 상위 중간계급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에 적극 동의한다. 어느 나라에서든 최근 능력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마코비츠가 말하는 상위 10퍼센트뿐만 아니라 하위 중간계급을 비롯한 더 많은 계급, 계층이 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직접적 이익을 받지도 않는데 왜 능력주의를 지지하는가? 그 이유는 지식 중간계급 전체가 공유하는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지식 중간계급이란 사회를 계층 상승 경쟁이 벌어지는 사다리로 바라보는 집단이다. 그들이 이런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좀처럼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는 물적 기반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 대학원에 이르는 긴 학교 생활과, 국가기구든 기업이든 관료적 조직에서 보내는 직장 생활이다. 이 두 경험은 지식 중간계급의 일상생활과 생애주기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제도는 능력, 실은 지능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 끝없는 경쟁을 통해 더 높은 등급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구조를 띠고 있으며, 개인의 성공 혹은 실패를 그 개인의 능력(지능)과 노력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상위 중간계급은 이런 구조가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실제로 대를 이어 성공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능력주의의 열혈 지지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은 돌 다 패배를 맛보지만, 이 패배에 반응하는 방향은 사뭇 다르다. 노동계급은 경쟁에서 일찌감치 퇴장하며 능력주의를 묵인하더라도 마지 못해 그러는 경항이 있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은 학교와 관료 조직 안의 경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며 다만 경쟁이 좀 더 '공정' 해지길 바라거나 아니면 재도전 기회(내가 아니라 자녀를 통해서라도)를 얻길 바란다. 상위 중간계급의 직접적 이익뿐만 아니라 하위 중간계급의 이런 동의와 미련이 능력주의적 사고와 시스템을 지탱해 준다.
달리 말하면, 능력주의는 지식 중간계급이 내부의 심각한 차이와 긴장, 갈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구심력을 갖게 만든다.

그렇기에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 사이에서 일단 의심과 동요가 시작되면, 이는 체제에 심대한 충격을 주게 된다. 가령 고등교육을 받느라 부채만 젊어진 채 아직 관료 조직에 진입하지도, 자산 시장 투자에 나서지도 못한 젊은 세대가 능력주의를 비롯한 기존 경쟁 무대 전체를 불신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대서양 양쪽의 여러 나라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대선 후보 예비경선에서 열렬히 지지했고, 스페인에서는 "지금 당장을 민주주의를!"을 외치는 신세대 사회운동이 정치세력화에까지 성공해(급진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Podemos의 창당) 기존 양당 독점 정치를 뒤흔들었다. 2010년대에 시작된 이들 운동의 결말은 아직 열려 있지만, 적어도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들이 관리자본주의의 가장 취약한 부위임은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만큼 이들 계층을 체제에 단단히 얽어매 주는 능력주의의 존재와 역할은 세계사의 전개에 결정적인 변수가 아닐 수 없다.

1987년의 여진이 남아 있던 시기에는 노동계급과 지식 중간계급이 서로 활발히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노동계급이 새롭게 만들던 민주적 노동조합의 행동 양식과 문화가 특히 학생운동 경험을 지닌 세대를 중심으로 지식 중간계급에까지 전파됐다. 공기업, 금융, 교육, 언론 등의 부문에서 제조업 사업장 못지않게 전투적인 노동조합들이 출범하고 이들이 결성한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약칭 업종회의)가 나중에 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결성의 한 축이 되었으니, 노동계급 문화가 다른 계급,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길 만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지식 중간계급의 상당 부분을 중간계급이 아닌 새로운 노동계급으로 바라보는 '지식 프롤레타리아'론이 회자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발해지면 지식 중간계급도 그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과 정서, 상식, 이념을 공유하는 사회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일단은 확인된 셈이었다.
그러나 1987년의 여진이 희미해질수록 사회운동보다는 지식 중간계급을 둘러싼 일상 세계가 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특히 1996~1997년 외환위기로 중간계급의 상당수가 몰락의 위협을 겪은 뒤에는 87년 직후와는 전혀 다른 지향과 선택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중요했는데, 둘은 모두 아주 넓은 의미에서 '투자' 대상이라 여겨지는 것들이다. 하나는 부동산 투자, 즉 집이고 다른 하나는 '인적자본 투자'라는 이상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교육이다.

기업별 노동조합도 노동조합이기는 하다. 노동법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업별 노동조합을 노동계급 조직이라 할 수는 없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계급'으로 묶지만, 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은 단지 '종업원' 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대투쟁과 그 직후에 노동자들은 당시의 노동법 탓에 기업별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어용 기업별 노동조합을 민주화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어쩔 수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좀 더 일찍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노동계급보다는 지식 중간계급에게 유리한 조직 형태였다. 사무직, 전문직이 중심이 된 기업 단위 노동조합은 승진 사다리 아래쪽에 있는 사원들의 목소리를 내는 기구로는 제격이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고용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들에게는 만들고 꾸려 가기 참으로 벅찬 조직 형태었다. 유급 상근 간부를 두고 단체교섭을 준비하는 등의 일상 활동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회사와 공안 당국의 탄압에 취약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대투쟁 직후에 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곧 노동조합을 포기해야 했고, 이후에도 중소기업에 고용됐거나 고용 형태가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은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노동계급의 여러 집단 중에 오직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기업별 노동조합을 꾸려 고용주를 기업별 교섭에 끌어내고 실질적인 성과를 쟁취할 수 있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업별 노동조합과 기업별 단체교섭을 무기 삼아 계속 임금을 올리고 일자리를 지켰다. 그리하여 소득 수준이나 고용 안정 측면에서 이들과 다른 노동자 집단 사이에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이 격차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운동 안팎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다. 그러나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업별 노동조합을 통해 다른 노동자 집단보다 더 많이 확보한 임금 소득이 주로 어디에 쓰였느냐는 것이다. 그 용처는 지식 중간계급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가 소유주가 되고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충당하는 데 쓰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소유 주택을 장만하고 자녀들의 입시 경쟁을 지원하는 데 쓸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임금 인상이 그토록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 가운데 1987년의 성과를 가장 많이 지켜낸 집단의 생활양식이 지식 중간계급과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일터에서 하는 행동은 많이 달라 보였을지 몰라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하는 선택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강남 '중산층' 문화는 지식 중간계급에게 확산됐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일부에게까지 이토록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노동자들 역시 사회를 거대한 경쟁 사다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등의 격차와 차별은 사회를 다른 무엇으로
상상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21세기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가 미친 듯이 질주하게 하는 힘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강력하지만 그런 질주를 조금이라도 견제할 만한 힘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능력주의의 사회적 토대인 지식 중간계급은 계급 내부를 넘어 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반면에 능력주의 발전의 역사적 장애물이었던 노동계급은 하나의 계급이라 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미국이나 서유럽도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친 뒤의 모습은 크게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는 한때 성장했던 노동계급 문화가 쇠퇴한 결과이지만, 한국 사회는 그런 문화가 채 등장도 못 해 봤다. 전 세계 최첨단의 능력주의 디스토피아가 등장하기에 지구 위에서 이곳보다 더 나은 토양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능력주의가 단지 어떤 유별난 사회의 도덕이나 문화 문제가 아니며 교육 영역에 한해 나타나는 편향이나 일탈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사회 세력들, 즉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신흥 중간계급이 벌이는 드라마에서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중략)
이런 시각을 깔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을 돌아보면, 새삼 이런 물음들이 떠오른다. 첫째, 왜 일자리가 노사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그토록 비판을 받았는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일자리는 노동권의 문제다. 그리고 노동권과 관련된 모든 사안은 노사 협상의 쟁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기업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고 비정규직 일자리를 줄이는 일은 충분히 단체교섭으로 결정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국제적 상식에 따라 문제를 풀어 가려 했다. 그러나 일부 정규직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정규직 일자리는 시험 성적에 따라 배분되어야 맞으며 노사 협상으로 정규직이 된다면 이는 반칙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상식인 것이 이사회에서는 몰상식 취급을 당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속살은 무엇인가?
둘째, 왜 정규직의 목소리가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압도하며 주목받았는가? 이 논란 와중에 일부 정규직 사원들만 목소리를 낸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고 공론장에서 주된 음조로 인정받은 쪽은 정규직 사원들의 주장이었다. 줄곧 '공정'만 주목받았다. '격차'나 '차별', '노동권'은 유독 이 논란 중에는 부차적이거나 별 상관없는 주제인 양 치부됐다.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 그들이 속한 노동조합을 통해 발언했는데도, 결과는 이러했다. 공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를 가른 이 균열과 대립의 선은 혹시 더 심각한 차원의 단절선은 아닌가? 이 선이 가르는 것은 실은 서로 다른 두 계급은 아닌가? 이 물음들은 모두 한 가지 진실을 향한다. 우리가 능력주의의 세계사를 훑으며 확인한 대로, '공정' 논란의 이면에 자리한 능력주의는 계급 문제라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에서는 이 집단(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의 일부가 실제로 '밀레니얼 사회주의자'가 됐다. 지식 중간계급의 일부가 중간계급 세계관을 버리며 중간계급에서 이탈한 격이다. 
하지만 한국은 적어도 아직까지, 이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젊은 세대를 비롯해 하위 중간계급 대다수가 '강남 중산층'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정쟁에서 칠수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경쟁이 보다 '공정'하게 이뤄지길 요구한다. 실제로는 능력주의 시스템을 통해 안정적인 과실을 쟁취하기 힘든데도 이 시스템에 여전히 기대를 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서는 예컨대 '고시' 신화 같은 요소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한다. 지식 중간계급 전체가 궁핍에 시달리던 아득한 옛날(1950년대)에 구원의 동아줄 노릇을 하던 '고시'와 같은 통로가 자신들에게도 열려
있길 바라는 것이다. 덕분에 한국형 능력주의는 시험주의의 외양을 강하게 띠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 중 다수는 상위 계층보다 오히려 더 열렬하게, 능력주의의 신실한 신자가 된다. 사실 상위 계층만 있다면 능력주의가 이토록 세를 넓히며 번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능력주의의 성공 비밀은 지식 중간계급 상위 계층이 아니라, 하위 계층의 열띤 지지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는 더더욱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어찌면 현 체제를 뒤혼들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그 집단이 체제에 누구보다 더 단단하게 결박돼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능력주의여, 너의 능력(merit의 본래 뜻에 가깝기로는, 업적)이 너무도 크구나!

앞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에서 비롯된 논란에 두 가지 물음을 던지며 운을 떴다. 지금쯤은 이 물음들의 답이 어지간히 분명해졌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식 중간계급의 세계관이 과도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그래서 단체교섭을 통해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자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쪽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쪽에 압도당한
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중심부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식 중간계급의 영향력이 노동계급을 앞서게 됐지만, 그래도 일자리는 노사 협상의 고유한 쟁점이라는 상식 정도는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보편적 상식을 주장하는 이들이 오히려 눈치를 봐야 한다.
정규직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주장에 쏟아진 관심의 온도가 전혀 달랐던 이유도이린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에 반대한 일부 정규직 사원들의 조직은 비록 이름이나 형태가 노동조합이라 하더라도 실은 지식 중간계급 조직이다. 노동조합에 속했다고 다 노동계급인 것은 아니다. 가령 인천국제공항의 경우에 정규직 사원들은 대개 관리 감독 업무를 맡으며, 실제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제껏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한데 일단 논란이 불거지자 언론이나 온라인 공론장에서 더 빈번히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으로 정규직 사원들의 목소리였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구조적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관심사나 지향, 가치에 편향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언론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지식 중간계급이고, 온라인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데 가장 능란한 것도 지식 중간계급이다. 이들이 자신을 중간계급으로 만드는 그 세계관에 별다른 의심을 던지지 않을 때. '공정'한 경쟁은 부각되지만 차별에 맞선 '평등'은 가려지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 중간계급이 과대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은 두 개의 거대 우파 정당이 독점하는 정치를 통해 그 절정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치는 극우파 정당인 국민의힘과 중도 우파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양분한다. 두 당이 제도 정치를 독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구조적 이유가 있지만, 가장 커다란 요인은 역시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 위주의 국회의원 선출,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 선출 같은 승자독식 선거제다. 이념 차이도 별로 없는 데다 각급 선거에서 무조건 1위만 하면 권력을 쥐기에 두 당은 지역사회나 온라인에서 여론 주도 능력이 강한 집단만을 염두에 두고 정치 활동을 펼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런 집단이란 지식 중간계급의 여러 계충이다. 그러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다가도 '공정'을 내세우는 정규직 사원들의 불만이 분출하면, 주저 없이 '공정'론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는 국민의힘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마찬가지다.
피케티는 역저 '자본과 이테올로기'에서 본래 노동계급의 대변자였던 서유럽 좌파 정당들이나 노동계급과 동맹 관계에 있던 미국 민주당이 20세기 말에 고학력 중간계급을 주로 대변하는 '브라만 좌파'로 변질했다고 비판한다. '브라만 좌파'가 된 주류 좌파 정당이 '상인 우파'라고나 할 우파 정당과 함께 제도정치를 지배하다 보니, 브라만(지식계급)도 아니고 상인(자본가계급)도 아닌 노동계급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야 할 책무를 지닌 정치가 오히려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는 역합만 한다. 한국의 양대 정당도 피케티의 이 도식,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에 들어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식 양대 정당 독점 정치 역시 그 효과는 대동소이하다. 현존 정치를 통해 능력주의의 승자인 상위 중간계급의 승리는 더욱 탄탄히 보장되고, 하위 중간계급의 불만은 늘 능력주의 같은 기존 틀 안에 갇혀 '대의'(대변)되며, 대다수 노동계급은 대의의 사각지대로 방치된다.

계급 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홀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은 ...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마이클 영 <능력주의> 중 '첼시 선언')

정반대로 한국의 노동조합이 능력의를 제어하는 진지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기업별 노동조합에서 벗어나 산업별 교섭을 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전환 하나만으로도 능력주의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세력 균형은 크게 뒤바뀔 것이다. 누구보다 지배계급이 이를 잘 알고 있다. 제대로 된 산업별 노동조합의 출현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한 충격을 줄지 잘 알기에 그토록 '귀족노조'를 지탄하면서도 기업별 노동조합 중심 체제를 결코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산업별 노동조합의 등장이 어떻게 능력주의 현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인가? 가장 근본적으로는 직종과 기업 규모, 고용 형태 등에 따른 소득 격차를 완화함으로써 능력주의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현재는 생산직인지 사무직에 따라, 대기업에 고용됐는지 아니면 중소기업에 고용됐는지에 따라 그리고 정규직인지 갖가지 형태의 비정규직인지에 따라 소득이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산업별 교섭을 통해 해당 산업 내에서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부분의 임금을 우선 끌어올린다면, 이런 격차가 점차 완화된다. 그러면 직종과 기업 규모, 고용 형태 등이 얽힌 거대한 일자리 사다리를 염두에 두고 평생에 걸쳐 경쟁할 이유도 점차 약해지게 마련이다. 지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얻는 일자리가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인지 아닌지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어긴다. 그렇기에 이를 결승점인 듯 바라보며 '지능 + 노력'의 경쟁에 다수가 기꺼이 뛰어든다. 그러나 중소기업 사업장에 취직해도 소득과 고용 안정, 노동 조건이 일정하게 보장된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가 굳이 이 경쟁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장의 경쟁 압박이 줄어들수록 능력주의의 지배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이 능력주의 현상에 개입할 수도 있다. 능력 다원주의의 화신이라는 역사적 숙명을 오늘날에 맞는 정교한 전략을 갖고 다시 떠안는 것이다. 가령 산업별 노동조합 주도로 산업 전체를 관통하는 노동자 숙련 형성 및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구상할 수 있다.이는 기업마다 임금 수준뿐만 아니라 임금 체제도 제각각인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실험될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변화 방향은 기업별 입금 교섭에서 산업별 임금 교섭으로 이행하면서 직종별 숙련급을 도입하는 것이다. 직종별 숙련급이란 해당 산업에 필요한 어떤 일(직무)을 맡아 하는지에 따라 임금을 받는 방식이다. (이는 독일 등에서 실시하는 산업별 직무급 제도에 숙련도에 따른 차등 보상을 더한 방안이기에 '직무직능급'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대안의 전제가 되는 한국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는 다음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정이환 지음, '한국 고용체제론', 후마니타스, 2013.)

'돌봄'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뜻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나왔다. 

돌봄 노동자들의 직업 '능력'은 현존 자본주의에서는 '반능력'이자 '탈능력'이다. 이들은 이 경계 지대에서 던지는 참으로 아프고 난처한 물음을 통해 사회가 능력주의의 단잠에서 깨어나도록 흔들 수 있다.

지식 중간계급을 자본가계급에 단단히 결박시키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힘 한 가지는 이미 분명해졌다. 비록 논란 많은 작명이기는 하지만, 마이클 영은 그 힘에 이름을 지어 주었다. '능력주의.' 이것은 지식 중간계급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인구 또한 늘어나는 사회에서 이 계급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퍼지기 쉬운 정서이자 상식, 인간관이자 세계관이다. 즉,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상수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사상가·운동가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인지 노동이 중요해지면서 경제 권력이 이들의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이들 노동자들이 '우수함', 혹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게 만들려 했다고 진단했다. 불행히도 이 시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패를 맛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비포' 베라르디는 능력주의의 온상 격인 그 집단, 즉 지식 중간계급 내부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지식 중간계급 안에서 거대기계의 부속품 신세에 회의하고 자유와 연대를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때에만 현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 질서가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과제는 "공통의 의식을 구축하고 신경 노동자들[코그니타리아트] 사이에 가능한 사회적 연대 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이며 "수백만 명의 기술자, 예술가, 과학자들의 윤리적 각성은 우리가 그 윤곽을 이미 어렴풋이나마 보고 있는 놀라운 퇴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 장석준,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갈라파고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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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적응

2017년 보고서에서 영국에 기반을 둔 엘런 맥아더 재단은 '의복을 입는 평균 횟수의 중가'가 어쩌면 의류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옷의 착용 횟수를 두 배로 늘리면 의류업계의 기후 오염을 거의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전 세계가 의류 생산을 1년간 정지하면, 1년간 모든 국제선 운항을 중단하고 해상운송을 멈추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수백만 명이 그 옷들을 생산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동자 대다수는 의류산업에 크게 의존하는 가난한 국가에 산다. 세계에서 옷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그다음은 방글라데시로, 이 국가는 미국 절반 규모의 인구가 아이오와보다도 작은 땅에 산다. 방글라데시는 제조업 일자리의 3분의 1 이상과 수출의 거의 85퍼센트가 의류 산업에서 나온다. 주민의 5분의 1이 국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국가에서 의류 산업이 400만 명 이상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의류 산업 종사자 열 명 중 여섯 명은 여성이다.

무언가가 너무 저렴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 있다. 마헤르의 직원들은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한 달에 120달러에서 140달러를 버는데(국제 기준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기준으로도 낮은 금액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패스트패션의 주기가 빨라질수록 스트레스가 극심해진다. 공장 문밖에서는 국가가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칙을 무시한 결과 발생한 환경 피해를 건뎌야 한다. 한때 '동양의 댄디'로 알려쳤던 나라양간지의 공기는 보통 회색빛이 도는 황토색이며 가끔 외국 방문객에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나라양간지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기적처럼 파란 하늘이 나타난 도시 중 하나다).
방글라데시는 기후변화의 타격이 가장 극심한 국가 중 하나인데, 방글라데시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은 부유한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데도 그렇다(예를 들어 독일이나 일본보다는 25배가량 낮고,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는 약 40배 낮다). 방글라데시의 영토 대부분은 히말라야의 물이 흘러내리는 방대한 저지대의 강 삼각주에 위치해 있어서, 빙하가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더 강력한 사이클론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해수면이 높아지는 상황에 특히 취약하다. 마헤르가 대학을 다닌 도시인 치타공은 현재 거의 1년 내내 만조 때마다 곳곳에서(도시의 60퍼센트) 홍수가 발생한다. "물이 가정집까지 차올랐다 빠져요." 마헤르가 말했다. "점점 베네치아처럼 되고 있죠. 이 베네치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지만요. 이 도시의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물에 누가 빠져 죽고 싶겠어요."
그러나 마헤르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피해, 바로 그의 회사에서 생산한 옷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가격에 판매되는 것을 지켜보는 모욕감이다. "Z세대와 밀레니얼은 윤리적 상품을 요구합니다." 마헤르가 말했다. "하지만 패스트패션 티셔츠를 4달러, 또는 2달러에 살 때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 티셔츠가 베를린이나 런던, 몬트리올에서 이 가격에 팔릴 수 있지? 어떻게 4달러에 목화를 재배하고, 솜을 만들고, 실을 잣고, 엮고, 염색하고, 날염하고, 꿰매고, 포장하고, 운송할 수 있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과 닿아 있는지 전혀 몰라요. 자기가 낸 돈이 그들의 임금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의류업계의 가장 큰 위험은 쇼핑의 둔화가 아니라 쇼핑을 둔화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마헤르는 말했다. 수십억 명이 이미 충분한 옷을 소유한 세상에서 옷을 계속 구매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불필요한 수요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요를 발생시키는 방법은 유행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유행을 가속화하는 방법은 옷을 더 자주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하게 만드는 것이다. 옷을 그만큼 저렴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품질과 노동조건, 임금 및 환경기준을 무시하는 것이며, 방글라데시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상의 재앙을 살아내고 있다.

토라야(일본의 제과회사)에서 만드는 과자는 와가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와가시가 사로잡는 감각에는 무려 청각도 포함되는데, 하늘 여행, 아와의 바람, 사라시나의 가을달처럼 고요한 심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도록 개별 이름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밤의 매화라는 이름을 가진 까맣고 단단한 작은 양갱이다. 양갱을 자르면 하얀 통팥의 단면이 드러나고, 그 모습이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매화와 그 떠다니는 향기'를 상기시킨다.

토라야는 때때로 '에노키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역사가 긴 가족 기업의 사례다. 에노키앙은 1981년에 제라르 글로탱이 만든 용어로, 당시 글로탱은 1755년 프랑스에서 아니스 리큐어 회사로 첫 등장한 가족 기업 마리 브리자드의 사장이었다.  (중략)
가족 기업의 역사는 그동안 간과되었다. 가족 기업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연구원들이 밝혀낸 내용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가족 기업이 전체 회사의 약 70퍼센트와 전체 노동력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기업은 경제의 '히든 챔피
언'이라 불린다. 이러한 가족 기업으로는 작은 구멍가게,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 미용실, 열쇠공, 도급업자, 프리랜서, 의사 및 번호사, 회계사 사무실 등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이를 치료하고, 신발을 수선하고, 양복을 드라이클리닝하고,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 조경을 말아주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피자를 구워주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술집이나 카페를 운영한다. 이들은 코로나19 위기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동네 주민이 파산을 막기 위해 결집하는 사랑받는 지역 사업일 확률이 높다.

구로카와는 사업을 할 때 딥타임(수익 창출과 성장 속도 등의 단기적인 목표 대신 사회, 환경적으로 더 나은 실천과 사업의 지속 가능성에 중점을 두는 사업관) 사고가 단기적 사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까? 그는 차분한 사람이며, 내가 둘 다 중요하다는 대답을 기대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물론입니다'라고 말했따.
구로카와가 역사적 교훈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1915년 도쿄는 신사를 짓고 신성한 숲을 조성해 얼마 전 붕어한 천황을 기리기로 했다. 당시 선택된 지역은 도시 외곽의 축축한 농지였다.
임학자들은 이 계획을 여러 단계로 나누었다. 가장 첫 단계는 얼마 없는 소나무 주변에 10만 그루의 어린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100년 뒤에는 참나무와 밤나무, 녹나무 같은 활엽수가 자라나 야생의 숲을 이룰 것이었다. 계획에 참여한 그 누구도 살아서 최종 결과물을 볼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성숙림이 하라주쿠역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차분함이 흐르고 폐로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푸른 휴식처이며, 사방으로 도쿄라는 대도시의 지평선이 펼쳐져 있다.
구로카와는 딥타임 비전의 탁월함에 경외감을 느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인간 삶에 어떤 열의를 가질 수 있나요?"

토라야의 모토는 "전통은 계속되는 혁신이다"이다. 프랑스어로 번역한 문장은 더 완강하다. "전통은 혁명의 연속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윤 추구의 동기가 혁신을 이끈다고 주장했지만, 그 또한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은 아닌 듯 보인다. (중략)
수천 가지 사례가 혁신은 돈과 성장을 위한 욕구에서 나온다는 개념을 반박한다. 아마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레는 우주에서 수익을 내려는 목적보다는 냉전 경쟁과 탐구열의 결과에 더 가까있던 1969년의 미국 달 착륙일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이메일인테, 이메일은 프로그래머 레이
톰린슨이 정부자금을 받은 인터넷의 전신 아르파넷을 연구하다가 부수적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이후 톰린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후원자였던 미 국방부는 이메일이 필요하다는 류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상사도 이메일에 관해 뻥긋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이메일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투자금 10억 달러를 끌어들이려고 덧없이 사라질 또하나의 앱을 만들려는 현대 스타트업과는 완전 딴판이다.

대침체가 한창일 때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 폴 볼커는 모기지 담보부증권처럼 세계경제를 쓰러뜨린 새 금융상품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이 상품들은 우리가 더 많이 만들고자 하는 훌륭한 혁신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20년간 내가 본 가장 중요한 금융 혁신은 ATM이었습니다. 이 기계들은 사람들에게 진짜로 도움을 줬습니다." 볼커의 이 연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소비문화는 그 미친 듯한 활기에도 불구하고 종종 원자화되며 개인적이다. 홀로 함께 있는 군중인 것이다.

대거넘(바킹 대거넘 자치구)의 참여자들에게 에브리원에브리데이(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안)가 문을 열기 전에는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었다. 쇼핑을 하거나, 손톱 관리를 받거나, 술집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거나, 당일치기 여행을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들은 대답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였다. 
"이 동네에서 14년째 살고 있어요." 다비리가 말했다. "제가 하는 거라곤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집에 처박혀 있는 것뿐이에요. 출근을 안 하는 주말에도 금요일 저녁 집에 돌아온 뒤 일요일 아침 교회에 갈 때까지 집에서 안 나가요. 우리 가족은 저와 대니엘라뿐이에요. 아이가 매일 물어봐요. '엄마, 우리 어디 가?'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죠. '아무 데도 안 가.'"
알고 보니 바킹 대거넘은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는 참여 문화를 실험하기 완벽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소비사회에서 우리의 제1 역할이 일하고 소비하는 것이라면 대거넘 주민 상당수가 사회에서 배제된다. 많은 사람이 꾸준한 일이 없거나 은퇴 후 소득이 매우 적거나 무직 상태이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내야 할 돈을 내고 나면 쓸 돈이 없을 만큼 소득이 적다. 바킹 대거넘 자치구는 소비사회에서 소비할 여유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유함이란 기이한 것이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 기본적인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것은 1세기 전과 그리 다르지 않다. 반면 부유함은 절대적인 사치나 편안함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과 비교한 사치 및 편안함과 관련이 있다.

리바운드 효과(기술과 사회적 행동의 변화에서 비롯한 뜻밖의 결과)가 우리를 시작 지점보다 더 나쁜 곳으로 이끌 때 이를 '역효과'라 한다. 우리는 역효과 경제, 역효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리바운드 효과는 다방면으로 이상하다. 에너지 체제에서의 기술화에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하는 엘리자베트 뒤치케에 따르면, 어떤 리바운드는 '도덕적 허가', 즉 좋은 행동으로 나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경향에서 비롯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비건 식단을 하기로 결정한 뒤(육류 생산에서 발생되는 탄소 배출량이 많기 때문에) 비행기를 더 많이 타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독일의 한 연구는 연비가 좋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운전을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뒤치케는 좋은 연비가 더 크거나 힘이 좋거나 호화로운 자동차를 사도 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전기차
를 구매한 노르웨이인들은 휘발유차를 탈 때보다 볼일이 있을 경우 자동차를 더 많이 사용했다. 실제로 전기차 이용이 늘어나면서 겨울에 전기차를 미리 덥혀놓거나 쇼핑하는 동안 반려견이 편안히 있게끔 차 에어컨을 틀어놓는 등의 다양한 낭비 행위가 더 많이 보도되었다. 뒤치케는 이러한 리바운드 메문에 의도적으로 '녹색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 본인의 생각보다 별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아예 차이가 없거나, 심지어는 환경에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충족감을 연구하는 마렌 잉그리드 크로펠트는 주류 소비습관에 저항하는 네 종류의 집단을 관찰해 이들이 환경 파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줄이는지를 살펴보았다. 네 집단은 각각 친환경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환경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 돈 절약을 좋아하는 알뜰한 소비자, 돈 쓰기를 싫어하는 구두쇠, 적극적 선택으로 소비를 줄이는 자발적 단순주의자였다. 이 네 집단 중 자발적 단순주의자가 환경 파괴를 줄이는 데 단연코 가장 성공적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2위를 차지한 구두쇠보다 거의 두 배나 효과적이었다. 알뜰한 소비자들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줄이지 못했고, 이는 친환경적 소비자도 마찬가지였다. 녹색 소비가 최근 몇십 년간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전반적으로 실패한 사실이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지구에 흔적을 덜 남기며 살아가고 싶다면, 친환경적인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더 간소하게 사는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4부> 변화

사람들은 자신이 자연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 하나는, 인간 세계가 뒤로 물러나면 자연 세계가 앞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바다에서 가장 빨리 발생하는데, 바다에 사는 생명체들이 매우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 생명체들은 사람이 사라진 것을 감지하고 그 빈 공간을 찾아와 헤엄친다. 팬데믹 동안 자연이 복원되고 있다는 최초의 증거들은 불현듯 한산해진 물속에서 주로 나타났다. 고요하고 깨끗해진 베네치아 운하에 물고기와 해파리가 나타났고, 인도 콜카타에서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가트(목욕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가의 거대한 계단) 근처에 강돌고래가 등장했으며, 멕시코의 인기 해번에서는 악어들이 파도를 탔다. 프리들랜더는 똑같은 원리가 육지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꾸준히 이어지던 인간 활동의 압박이 사라지면 야생동볼이 되돌아와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탐험 욕구를 비롯한 자신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을 드러낸다. 자택 대피령이 내려진 시카고에서는 코요테 한 마리가 이른 아침 텅 빈 시내를 구경하며 까르띠에와 구찌, 루이비통 매장 앞을 지나다녔다. 인도 북부에서는 코끼리들이 오래 전 인간이 침범했을 때 버리고 떠난 오래된 이동 경로를 되찾았다. 그중 한 마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작은 사원의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이 생태계를 잘 이해하고 있고 효과적으로 생태계를 관리하는 법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프리들랜더가 말했다. "자연은 우리보다 스스로를 훨씬 더 잘 관리합니다. 그냥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면 돼요. 숨쉴 공간을 주는 거죠."

마이클 S. W. 리가 찾은 반소비자와 소비자의 또다른 핵심 차이는 폭넓은 '관심의 영역'이다. 즉 이들은 개인적 필요를 넘어서는 문제에 관심이 더 많
다. 반소비자는 기후변화와 생물종의 멸종, 인종차별, 빈곤처럼 불안하고 우울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할 수 있는 문제에 더 많이 관여한다. 이러한 주제에 관여하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인데, 이는 삶을 유의미하게 하지만 아마 쾌활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오이카와는 부자인 상태로 사도섬에 오지 않았고, 앞으로 부자가 되리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곳으로 이사한 이후 그는 유토리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유토리는 영어로 직역할 수 없는 또다른 단어로, '우리의 일상에서는 유토리를 찾아볼 수 없다" 같은 표현에서 쓰인다. 이 단어의 대략적 의미는 숨 쉴 여유라는 뜻에서의 여유다. 유토리는 어떤 이에게는 든든한 저축액이고, 어떤 이에게는 넉넉한 시간이나 아름다운 주거 환경, 차분한 정신, 가능성이 있다는 느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자유다. 대다수의 유토리는 앞에서 말한 것들의 전부나 일부가 섞여 있을 것이다.

하타의 오가와마치 이주는 천천히 이루어졌다. 처음에 그는 도쿄로 통근을 했다. 그러다 유기농 농장의 물류 일을 맡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새로 전입한 주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오늘날 사람들을 오가와마치로 끌어들이는 가장 큰 요인은 유기농업이다. 1970년대에 한 선구적인 농부가 이곳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했고, 그의 제자들이 서서히 주변에 퍼졌다. 한때는 오가와마치 주민 대부분이 매일 열차를 타고 도쿄로 출근했 듯 거의 모든 농산물이 도쿄로 보내졌다. 그러나 도쿄의 물살이 빠져나가면서 현재 오가와마치는 유기농업을 경제의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타가 나를 데리고 간 식당도 유기농 음식을 내놓는다. 슈퍼마켓도 지역 소유로, 오가와마치 생산자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오는 양조장은 반경 4킬로미터 이내에서 가져온 재료로 맥주를 만든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파는 도넛도 유기농 두부를 만들고 남은 물로 맛을 낸다. 요즘에는 많은 곳에서 이와 비슷한 가게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한때는 평범한 교외 지역이었던 곳에 이러한 가게들이 이만큼 집약된 것은 본 적이 없다.

많은 수렵, 채집인 문화가 과잉 수확을 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시포테이토를 제철에 다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면 부시포테이토가 다시 번식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어쩌면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의미의 경제 행위일지 모른다. 자원이 미래에 사라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긴 노동시간은 주콴시가 생각하는 풍족한 삶의 개념을 훼손한다. 자발적으로 간소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더 강력하게, 주콴시는 칼라하리사막의 한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쉽게 충족할 수 있는 필요만 아주 적게 가짐으로써 케인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다. 더 적게 가진 삶에 주어지는 보상은 본래 풍부한 여가시간이어야한다.

주콴시가 간소한 삶을 사는 이유에 대한 이론에는 저마다의 진실의 일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주일 치 식량을 가져올 수 있는데도 하루이틀 치 식량만 채집해온 이유를 내가 보기엔 그 무엇도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게다가 이들은 가뭄에도 똑같이 행동했다.
주콴시와 세계 소비사회의 또다른 분명한 차이를 고려하면 이 모든 것은 더욱 불가해 보인다. 그 차이는 바로 주콴시가 나눔을 아주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주콴시에게 적용되는 '나눔 '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따뜻하고 어렴풋한 개념이 아니다. '부의 재분배' 라는 용어조차 이들의 행동을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재산은 국가가 집행하는 세법 및 임금법, 또는 개인 기부자가 자기 재량에 따라 나눠주는 자선기금을 통해 재분배된다. 주콴시에게 나눔은 권리와 책임을 수반한다. 이곳에서는 내게 없는 것을 누군가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나눠달라고 (보통 직설적으로) 요청할 권리가 있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나눔 요구'라 칭한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얻으면 그것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 주환시가 지침으로 삼는 일반 원칙은은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든 간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보다 가진 것이 더 적고 같은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과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오늘날 니아에니아에서 수행하는 나눔을 연구하는 인류학자 메건 로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은 '타인에게 취약한 상태'가 되라고 요구받는다.

간소한 삶과 가난의 차이는, 하나는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 아니라는 데 있다고들 한다. 

 

- J.B. 맥키넌, THE DAY THE WORLD STOPS SHOPPING/디컨슈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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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행동  (0) 2023.02.28

<2부> 균열

기술 진보로 저렴해진 태양력과 풍력은 화석연료에 뒤짖지지 않는 경쟁력을 가졌어야 했지만, 이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화석연료 기업이 재생에너지를 석유와 가스 생산의 동력원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풍력과 태양력은 화석연료가 풍력과 태양력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 개인주의, 사기업, 긴축이라는 대처의 비전은 영원히 성장하는 경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 비전은 자주 인용되는 대처의 말, "대안은 없다. There is no alternative"의 앞 글자를 딴 TINA 정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략)
이 세계관은 지금도 지배적이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라는 것이 최근의 선전 구호다. (중략) 소비경제를 끝없이 확대하는 것이 시의회에서 대통령 집무실에 이르는 모든 정치인의 목표이며, 국립공원을 만들고 이민법을 제안하고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얼마나 용인할지 결정하는 등의 모든 일이, 성장을 억제할 것인가 촉진할 것인가의 시험대에 오른다.
빅터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거의 모든 인간 역사상 경제가 적게 성장하거나 아예 성장하지 않는 것이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이자 뛰어난 경제학자였던 사이먼 쿠즈네츠 (중략) 쿠즈네츠는 모든 경제성장이 동등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훗날 그는 "'더 큰' 성장의 목표는 무엇의,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라고 <뉴 리퍼블릭>에 말하곤 했으며, 독재 정권에서는 두려움이나 외적을 항한 증오를 동력으로 더 열심히 일하도록 사람들을 몰아가거나 억압함으로써 성장을 이뤄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쿠즈네츠는 국가의 회계장부에 더하기 칸과 빼기 칸이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각 칸에 어떤 경제 활동이 포함되느냐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쿠즈네츠 본인은 군사비를 오늘날처럼 GDP에 더하는 대신 GDP에서 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방위비는 잠재적 공격자 때문에 국가가 어쩔 수 없이 지출하는 항목이며 그 돈을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하는 데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쿠즈네츠는 소비 문화의 대단한 팬이 아니었다. 어떤 경제활동은 바람직하지 않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던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쿠즈네츠는 GDP가 "물질을 숭배하는 사회의 관점이 아니라 더욱 계몽된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나온" 경제적 목표를 반영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가 '이익이 아닌 해악'이므로 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제활동 중에는 광고와 금융 투기가 있었다. 또한 그는 가정주부의 무보수 노동이 국가회계에 포함되어야 할 활동은 아닌지 공개적으로 고민했다.

2019년에 뉴질랜드는 GDP를 경제성장의 주요 지표에서 공식 배제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고,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는 주요 지표로서 시민의 행복을 측정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 밖의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도 참진보지수Genuine Progres Indicator(이하 GPI)를 기록한다(미국의 메릴랜드주는 2010년부터 매년 GPI를 산출하고 있다). GPI는 경제에서 사회와 환경의 피해를 고려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GDP는 공장의 생산성을 무조건 성장으로 간주하지만, GPI는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기
오염을 성장에서 제한다.
20년에 걸친 연구들은 GDP와 GPI가 서로 다른 길을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먼저, 진정한 진보는 GDP보다 더 느리게 발생한다. 또한 GDP와 GPI는 보통 국가경제가 성장하면서 함께 증가하지만 어느 선까지만 그렇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GDP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GPI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거의 지지부진한 상태이며 성장한다 한들 매우 느린 속도로 성장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소비경제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시민들의 더욱 만족스러운 삶으로 전환하는 데 처참히 실패했다.
현재 시점에서 성장을 옹호하는 주장 중 비판받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으로 수백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인구 비율은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기 전보다 더 낮아졌다. 그러나 빈곤층 비율이 그 어느 때보다 낮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절대적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매우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세계 인구 수에 맞먹는다.

"모든 사람의 소득은 다른 사람의 지출에서 나옵니다. 모두가 지출을 줄이면 소득도 줄어듭니다. 일부러 성장의 속도를 극적으로 낮추는 데에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환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자에게도 피케티가 말한 '종말론적 예언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취향'있다. 경제가 고도로 성장한 시대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상이 만들어진 시대이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은 종종 이 두 가지가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의 종말이 곧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빅터는 처음 캐나다 경제 모델을 돌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단적 결론에 도달했다. 성장 없는 삶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빅터가 한번 소비를 4퍼센트 줄여보자고 말했다. 어쩌면 이 시나리오를 느린 소비 시나리오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목표가 늘 소비인 문화에서 이건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새 숫자를 입력한다. 그 결과 캐나다에는 완전한 재앙이 아닌 천천히 지속되는 경기 침체가 발생하고 실업과 투자금 손실, 정부 세입 감소 같은 익숙한 고난이 이어진다.
빅터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몇 가지 항목을 더 조정했다.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면 상품과 서비스 수요도 줄기 때문에 경제활동이 줄어든다. 할일이 줄어든다. 대량 실업을 막기 위해 빅터는 남은 일자리를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분배합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는 근무시간을 줄여 대다수가 일주일에 5일이 아닌 4일만 일하게 했다. 그리고 캐나다 인구의 성장 속도를 늦추었다. 이제 캐나다의 인구 성장은 오로지 이민 인구에서 나오는데, 이 조치 똫나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의 수를 제한한다(사람들이 계속 나이들며 노동인구가 줄기 때문에 여전히 이민자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 그 다음 빅터는 녹색 투자를 늘렸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여전히 소비 성향을 갖는 상품과 서비스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양을 줄이는 동시에 일자리와 소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여전히 경제에서 생산되는 부를 더욱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세율도 조정했다.
마침내 빅터는 실업률을 역사적 범위 내로 유지하면서 대다수에게 적절한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소비만 줄일 때보다 기후와 환경이 받는 압박을 더 많이 줄이는 데 성공했다. 분리와 탈성장이 주는 혜택을 동시에 거둔 것이다. 빅터의 완화된 모델에서도 실업률이 가끔 급증하지만, 가난한 계층에게 정부 지출을 돌리면 (교육이나 군사처럼 돈이 많이 드는 분야의 경비는 줄어든다) 빈곤은 심화되지 않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경제가 붕괴하는 일 없이 소비와 성장에 매우 극적인 제동을 걸 수 있다. 빅터가 자신의 저서 <성장 없이 살아가기Managing without Growth>에서 말한 것처럼, '재난이 아닌 계획에 따른 감속'이다.
이중 자연히 발생하는 것은 없다. 전부 권력자들이 결정을 내린 결과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빅터가 꼭두각시를 움직이듯 모든 것을 통제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치 지도자와 국가공무원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훨씬 잔혹한 선택지도 있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과 소득이 줄어들 때 정부는 일과 소득을 오로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수중에 몰아넣을 수 있다.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빈곤과 실업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줄어드는 쇼핑의 양 자체도 불공평하게 나타날 수 이다. 과소비가 심각한 사람들이 소비를 크게 줄이지 않을 수 있도록, 애초에 과소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강제로 지출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선택지들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계의 소비사회와 더 잘 어울린다.

오늘날 우리는 주택시장과 주식시장을 실재하는 실용적 성품을 거래하는 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카지노로 바라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재앙의 역설은 사람들이 종종 그때를 애틋하게 돌아본다는 것이다. 1920년대에 소수의 사회과학자가 '재난 연구'라는 분야를 만들면서 그 이유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중요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전쟁이나 지진, 허리케인 같은 대재앙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기보다는 돌보고, 원초적 두려움이 아닌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행동할 확률이 높다.

독일에서 공중폭격의 심리적 영향을 평가한 결과 폭격을 가장 심하게 당한 도시가 사기 또한 가장 높았다. 물론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누구도 전 세계의 절박한 난민들이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 결핍의 사례를 제외하면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은 더 적게 가진 삶에 빠르고 꾸준히 적응하며, 보통 그 과정에서 더 친절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되고 서로 더 돌똘 뭉치고 관대해진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경험한 강력 지진에서 영감을 얻은 저서 <이 페허를 응시하라>에서 이러한 존재 방식이 재앙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보통 때는 그러한 방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평소에 우리 대다수는 사회적 고립과 끝없는 시간의 압박으로 씨름하며,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함, 또는 자기 삶에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는 기분을 느낀다.
"일상은 이미 일종의 재난이며, 실제 재난은 이러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라고, 솔닛은 말한다.

경제적 재난은 종종 소비와 관련된 지위의 압박을 완화해준다. 예를 들어 경기 침체가 발생하면 소득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수 있지만, 부의 과시는 친박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호화스러운 집과 자동차 구매를 줄이는 경향을 보이며, 검약이 더욱 용인된다. 핀란드인은 집단으로서는 과거의 불황에 별 향수를 느끼지 않지만 그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많은 핀란드인이 그때를 자유로웠던 시기로 기역한다.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했던 1990년대의 유립과 북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에 인기를 끈 화사한 색감의 의류와 대대적으로 선전한 브랜드는 검은색 옷, 가죽 재킷, 청바지에 밀려났고, 옷은 해진 것일수록 더 좋았다. 취업의 기회가 차단되자 야망이 좌절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 또한 사라졌다. "소비가 적은 생활방식을 따르면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어요." 한 여성이 내게 말했다. "무슨 옷을 입을지, 자동차와 집이 최신식인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거든요." 이러한 안도감은 소비를 멈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적 변화 중 하나다.
1899년 노르웨이계 미국인인 사회경제 사상가 소스타인 베블런이 상류층의 행동을 냉정하게 관찰한 책 <유한계급론>을 썼다.이 책에서 베블런은 남들에게 훤히 드러내는 것이 주요 목적인 소비를 설명하기 위해 '과시적 소비 '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가 제시한 대표적 사례의 중심에는 왜 굳이 수공예 은수저를 갖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난방기와 온수기, 침실 커튼처럼 쇼어가 1990년대에는 '타인의 눈앞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상품들이 오늘날에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사진 속에서 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은 고사하고 친구와 가족도 휴가지나 식당에서 무엇을 소비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베블런은 이러한 세상이 찾아올 것을 예측했다. 그는 말했다. "물건의 과시적 소비는 서서히 중요성이 커지다 결국 최저한도의 살림만을 남긴 채 구할 수 있는 모든 상품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베블런재'다.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소비는 경쟁적 소비, 지위 소비, 심지어는 불쾌한 소비(타인에게 원망과 질투, 분노를 일으킬 만한 소비)라는 말로 묘사된다. 그러나 베블런은 좀더 동정심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과시적 소비를 하는 본질적 이유는 우리가 탐욕스럽고 샘이 많고 경쟁적이어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기존중이라 부르는 만족스러운 상태' 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데 끊임없이 소비를 이용하기 때문에, 오늘날 학자들은 이러한 소비를 종종 '위치 소비'라 칭한다. 실제로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자신을 위치시키기 때문에 어떤 과시적 소비는 기이할 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위치 소비는 소비주의가 낳는 가장 명확한 불행의 원인 중 하나다. 

현대 연구는 불평등이 소비주의의 작동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불평등이 지위 경쟁을 심화해 더 값비싼
핸드폰이나 고급 승용차, 소셜미디어에 올릴 수 있는 세계 여행 같은 부의 명백한 표지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돈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간단히 말하면 불평등은 물질주의적 가치를 독려한다. 불평등 연구자 리처드 월킨슨이 말한 지위 경쟁이 요구하는 '수행의 련'에,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과시적 소비를 하는 전형적인 물질주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자존감이 끊임없이 공격받아 우울이나 불안에 빠진다. 또 다른 사람은 약물이나 알코울, 소비로 도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실제로 쇼핑은 지위 불안에 일시적 '소비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 아마 대다수가 자기 삶을 들여다보면 앞에 말한 방식들이 조금씩 섞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적 심리적 필요를 채우는 데 자신이 없어질 때 더욱 물질주의적으로 변하며, 불평등은 그러한 불안을 악화시킨다는 이론을 방대한 양의 연구가 뒷받침한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크나큰 격차 또한 자신의 생활방식을 타인의 것과 비교할 적나라할 기회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는 베블런이 말한 '자기 존중이라 부르는 만족스러운 상태'에 이르기 위해 어떤 물건과 경험을 소유해야 하는지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소비를 멈춘 세상에서는 광고가 적어지리라는 것이다. 그 운명의 날에 그 어떤 산업보다 심각하게 붕괴되고 회복이 요원할 산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광고와 마케팅 산업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팔 수 있다고들 한다. 아웃도어 의류 기업 파타고니아에서 장사꾼이자 철학자라는 기묘한 혼종으로 일하고 있는 빈센트 스탠리는 2011년의 가장 쇼핑이 활발한 날에 이 명제를 시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 세계에서 광란의 쇼핑이 시작되는 블랙프라이테이에 뉴욕 타임스에 독특한 광고를 싣자고 제안했다. 이 광고는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잘 팔리는 플리스 스웨터의 사진 위에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 나머지 문구도 똑같이 직설적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지 마세요. 무엇이든 신중히 고민하고 구매하세요." 광고는 이 재킷이 일으키는 환경 피해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 재킷 한 벌을 생산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45명의 사람들이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들어갔고 대기에 거의 10킬로그램(재킷 자체보다 휠씬 무거운 무게)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었다.

많은 사람이 녹색 디마케팅을 위선이라 여기는 것도 퍽 타당하다. 기업이 자사 상품을 팔면서도 팔지 않기 위해 마케팅을 사용할 때 인지 부조화는 불가피하다. 파타고니아는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광고가 판매에 피해를 입힐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으며, 파타고니아의 디마케팅은 회사의 꾸준한 성장에 기여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암스트롱 술레는 블랙프라이데이 직전에 REI 매장에 들렀다가 직원들이 할인 쿠폰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상 REI는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저 블랙프라이데이에 진행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녹색 디마케팅이 이기적인 술책인 것만은 아니다. 이 전략이 아웃도어 기업에서 가장 두드러진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닌데, 야외 활동을 즐기는 많은 사람이 비교적 부유할 뿐만 아니라 소비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시장의 상당 부분은 이론바 '디컨슈머', 즉 자신 또는 세상의 소비가 줄어들기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소비를 줄인다는 사실을 알 때 그 행동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그 행동은 과시적 비소비가 된다. "그게 우리가 하는 소비의 상당 부분을 이끕니다. 우리가 어떤 상품을 고르는 이유는 그게 나와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죠." 암스트롱 술레가 말했다. "반소비를 실천하는 소비자에게 그러한 의미를 일부 되돌려준다는 생각, 제가 볼때 그러려면 전통적 의미의 광고가 많이 필요해요."

터너는 많은 소비자 광고가 제품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제품을 살 확률을 높이는 차별적 지위 체계까지 판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마케팅도 그저 상품을 구매하지 말라고 설득하거나 우리와 상품의 관계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차별적 지위 체계까지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타고니아는 자사 상품을 녹색화하면서 동시에 신상품을 적게 판매할 방법을 찾는 이중 접근법을 지속하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 없이도 살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립지조차 않은지를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코로나 위기는 작디작은 디컨슈머 시장이 성장할 가능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펜하임은 2000년대 초부터 적극적으로 광고를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광고 없는 영국의 공영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 BBC만 고집했다. 본격적으로 인터넷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는 마케팅을 차단하는 앱을 일찍부터 사용했고, 그 이후로는 광고 없는 잡지 및 프리미엄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매했다. "요즘 제가 보는 대부분의 광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보는 거예요." 오펜하임이 말했다. "야외 광고판이나 버스 광고, 지하철역에 붙은 포스터 같은 거요." 그럴 때 그는 광고에서 눈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20년간 오펜하임은 독특한 망명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낯선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저 광고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훨씬 거대한 무언가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가 등돌린 것은 물질주의 자체였다.

실제로 물욕이 클수록 부정적 효과가 커진다. 성공의 증거로 돈과 물건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 돈과 물건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간 관계보다 돈과 물건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력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물질주의적인가를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옹졸하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성향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 예측할 수 있다. 물질주의자는 타인을 효용적 태도로 대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이들은 '사용자'이다), 더 짧고 얕은 대인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크고, 외로울 확률도 더 높다. 물질주의는 공감을 가로막기 때문에 타인을 자발적으로 돕거나 환경을 염려할 확률을 낮춘다. 
즉 물질주의가 지속적인 위안과 만족, 행복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에서 물질주의가 맡은 역할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의 역할은 초조함을 키우고, 불안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나와 세상 속에서 성공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캐서는 내게 말했다. "행복의 자양분은 아니죠."

물질주의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행복 연구는 부유할수록 더 행복하다고 답한다는 결과를 꾸준히 내놓는다. 소득이 높으면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안전, 기회, 삶에 대한 통제권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필
수적 욕구가 일단 충족되면 추가 소득으로 늘어나는 행복의 양은 소실점을 향해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 사실이 사회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순간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 순간이 오면 '다른 인간들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그 필요를
느낀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욕구가 전부 충족되고, '동료 인간보다 지위가 높아지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만 그 필요를 느낀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욕구가 채워지기 시작한다(이 글을 쓴 1930년에 케인스는 이미 '이 두 번째 종류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음을 알았다. 우월함의 기준은 언제나 높아질 수 있고, 절대적 욕구 또한 음식과 옷, 주거지로 제한되지 않고 어느 정도 안락함과 항락을 위한 필수품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 순간을 파악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과제라고 말했고, 장기적인 경제·인구학적 추세로 볼 때 많은 국가가 2030년경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예측했다. 그때가 되면 인류는 케인스가 '다소 역겨운 병적 상태' 라고 비난한 '돈이라는 목적'을 옆으로 치워둘 수있었다.

그때가 되자 전 세계 수백만 명이 급격히 방향을 틀어, 연구 결과 우리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으로 드러난 바로 그 활동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추구한 것으로는 사회적 연결, 더욱 공고한 인간관계, 자연 활동, 개인적 성장과 발전, 영성과 마음챙김, 물질주의에 대한 적극적 거부 등이 있었다.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요로 소비를 중단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마치 인류에게 자신을 돌보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간과되었으나 명백하게 규모가 큰 하위 집단인 쇼핑을 즐기지 않는 여성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한때 셔츠를 210벌 소유했으나 영상으로 회의를 진행한 70일 내내 셔츠를 단 한 벌만 입었다는 연예 산업의 한 남성 중역을 인터뷰했다(그는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토론토에 사는 내 친구는 코로나 위기의 가장 긍정적인 측면은 남들쳐럼 살아야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연구가 소비 문화에서의 180도 방향 전환이 우리의 행복을 증진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지를 밝힌 연구는 매우 드물다. 그중 가장 정밀한 연구는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이 거의 10년 전에 실시한 것으로, 이 연구는 학생 집단에게 여러 내재적 가치('개인적 성장과 발전에 시간 투자하기', '봉사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기' 등)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지도한 뒤 행복도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일상적 활동에 대해 생각하라고 요청받은 학생 집단과 비교했을 때, 내재적 가치에 생각을 집중한 학생들은 즉시 삶을 휠씬 나은 것으로 느꼈다. 당시 이러한 연구 결과는 좀처럼 믿기 힘들어 보였지만, 팬데믹의 경험은 그러한 변화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세상이 소비를 멈추는 날, 우리는 아침식사가 식탁에 올라오기도 전에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재적 가치가 외재적 가치보다 나은 점은 기분을 좋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전보다는 더 났게 해주죠." 캐서가 말했다. "제가 볼 때 이런 내재적 가치의 증가는 평소에 사람들을 짓누르며 외재적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 무게가 어느 정도 가버위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내재적 가치는 더욱 쉽게 나타날 수 있어요."

경찰의 너무나도 익숙했던 살해 행위에서(조지 플로이드 사건) 평소보다 더 큰 변화가 비롯된 이유는, 인구 대다수가 평소 일하고 소비하는 단조로운 일상을 유지할 때와 확연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이 끔찍한 사건을 해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비를 멈춘 세상에서는 개인의 전환이 사회의 격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겨우 몇 분 만에 시작될지도 모른다.

"만약 내일 전 세계의 소비가 25퍼센트 하락한다면 나선을 그리며 추락하다 결국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다모다란이 말했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적응 기간이 있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훨씬 적은 것을 가지고 살아야 할 거예요."

건축가 존 브링커호프 잭슨은 "페허가 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세계에 완전히 들어서려면 구세계의 퇴락을 지켜바야 한다. 지금껏 살펴봤듯이, 경제적 재난 속에서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결코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대침체 때 파타고니아는 디컨슈머 시장의 진정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핀란드 불황 당시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에서 벗어나 안도감을 느꼈으며, 팬데믹 동안 수백만 명이 혼란 속에서 새로운 가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J.B. 맥키넌, THE DAY THE WORLD STOPS SHOPPING/디컨슈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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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조짐

20세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생환방식이 낯익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하는 식사는 드문 호사였고, 옷은 물려받아 입었으며 집 가까운 곳으로 휴가를 떠났고, 소비하는 삶의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또한 그때는 일상에서 돈을 쓰는 것이 통칙이 아니라 예외라는 감각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널리 통용되는 규범이었던 시기를,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지구생태발자국네트워크에 따르면 아마도 1970년이 인류 전체가 여전히 하나의 지구에 걸맞은 생활을 했던 마지막 해였다. 물론 선진국들은 훨씬 일찍 그 수준을 넘어섰다. 생태발자국네트워크의 분석가들은 미국의 평균 생활방식이 1940년에서 1960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추산한다. 영국과 캐나다, 독일을 비롯한 대다수의 선진국도 마찬가지이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본 같은 일부 국가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은 1979년에 그 선을 넘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현재 미국 인구는 1970년보다 60퍼센트 더 많지만, 총소비지출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도 400퍼센트 증가했다. 1965년과 비교하면 그 수치는 거의 500퍼센트에 달한다. X세대까지만 시계를 돌려도 지구 몇 개만큼의 과잉 소비를 없앨 수 있다.

2010년대의 거의 5년간 에콰도르에는 행복부 장관이 있었다. 어쨌거나 전 세계 미디어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중략) 그의 실제 직함은 세크레타리오 델 부엔 비비르였다. 그는 이 직함을 제대로 번역하는 것이 붙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 '부엔 비비르'를 영어로 옮긴 용어 중 '더 나은' 삶이라는 뜻을 내포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사실은 그에게 서구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더 나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무언가와 비교를 해야 해요." 그가 버려진 음산한 공항에 있는 근무처의 회의실에 앉아 내게 말했다. "그럼 무엇과 비교할까요? 내 할아버지보다 더 잘살고 싶습니다. 내 아버지보다 더 잘살고 싶습니다. 내 형제보다 잘살고 싶고, 특히 내 이웃보다 잘살고 싶어요. 20년 전의 나보다, 10년 전, 5년 전의 나보다 더 잘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제안하지 않아요. 더 나은 삶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거든요. 우리는 잘살자고 제안하죠."
엘러스는 자기 이름이 아닌 웃는 나무 그림으로 서류에 서명을 하고, (국군 대령을 비롯한) 방문객들에게 점심시간에 자기와 함께 참선을 하자고 설득하는 논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빈곤은 누가 가진 것이 적고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빈곤은 더더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이미 가진 것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죠." 

1940년대 후반, 매스 옵서베이션이라는 사회연구단체가 영국의 안식일에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중략)
일요일은 그저 볼륨을 낮춘 삶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류의 하루였다. 일요일에는 '시누이 '가 있었다. 매스 옵서베이선의 표현처럼, 당시에는 '일요일의 뉴스 몰아 읽기'라는 것이 있었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일요일에 최소 한 개의 신문을 읽었고, 4분의 1 이상이 세 개 이상의 신문을 읽었다. 신문을 읽는 방식 또한 평소와는 달랐다. 바쁜 주중에 사람들은 주로 일간 뉴스를 챙겼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더욱 깊이 읽으면서도(사건의 맥락을 제공하는 더욱 긴 길이의 기사) 더욱 얕게 읽었다(연예 뉴스 가십, 스캔들). 또한 라디오도 많이 들었다.

매스 옵서베이션의 보고서에는 사람들이 이처럼 다른 종류의 시간을 사용하는 테 능숙하다는 느낌, 이런 시간을 잘 보낸다는 느낌이 있다. 코로나19로 봉쇄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오늘날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계 되었다. 통근과 일, 쇼핑, 여행, 외식, 수많은 다른 오락거리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 끝없이 확장되는 현실 앞에서 많은 사람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미디어는 거의 즉시 자기 계발을 위한 아이디어로 넘쳐 흘렀다. 우리는 더 납작해진 배, 완벽하게 정리된 옷장, 끝내주는 홈 메이드 홀랜다이즈 소스,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함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식일의 원래 개념이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였다면(심지어 사위도우 한 덩이를 굽거나 반죽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팬데믹이 발생하고 처음 몇 주간의 황금률은 바로 그러한 행위만을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갈구해왔다고 말한 것을 움켜잡는 데 실패했다.
때때로 '타임푸어'이라는 말이 21세기의 끝없이 분주한 느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이러한 느낌의 핵심에는 모순이 하나 있다. 엄밀히 말하면 평균 가정이 임금노동과 집안일에 들이는 시간은 지난 수십 년 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자신의 자유 시간을 빽빽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던 영국에서 사람들이 빈둥거린 것은 딱히 다른 할일이 없어서였다. 몰론 오늘날에는 바느질과 정원일, 개 산책, 사교 모임 같은 오래된 취미에 더해, 카페에 앉아 있거나 친구와 외식을 하거나 위터파크에 가거나 부티크가 늘어선 거리에서 쇼핑을 하거나 낙하산 타기를 배우기나 지역 극단의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을 도울 수도 있다. 자유 시간의 운명은 스마트폰에서 잘 드러난다. 스마트폰은 세탁기처럼 시간을 절약해주는 장치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삶을 그때그때 조직할 수 있는 전례없는 능력을 얻은 우리는 똑같은 양의 일을 더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욱여넣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새천년이 시작될 무렵 인류학자 데이비드 캐플런이 말했듯, "그러한 사회에서 소비자가 되는 것은 곧 노동이다."

영리적 시간이 발달하면서 비영리적 시간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인 두 명이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 일반화되고, 영업시간이 야간 근무와 그 밖의 다른 비표준 근무시간으로 확대되면서, 일요일에 쇼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척 불편한 것이 되었다. 시민생활이 소비와 동의어가 되자 오락으로서의 쇼핑이 등장했다. 쇼핑몰에서의 하루는 교회나 야구장에서의 하루와 똑같은 가족 나들이가 되었다.
매스 옵서베이션과 인터뷰한 사람들의 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 번째는 아무도 일요일 휴업의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것(또는 그 수가 거론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도 이미 삶은 종종 '광적인 속도' 라는 말로 묘사되었지만, 모두가 7일 중 6일은 쇼핑을 끝내기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그 누구도 일요일 휴업이 기업 매출이나 영국 경제에 미칠지 모를 영향을 신경쓰지 않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후 진행된 수많은
연구가 일요일 휴업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중략) 영국 시민들이 일주일에 한 번 영리적 시간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통해, 경제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단 하나의 불가분한 삶의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꼭 필요한 관점을 얻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긴 했지만, 알고 보니 안식일을 놓아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슐레비츠가 말한 '분주함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저 사회 전체가 아닌 개인의 삶과 가정 내에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저항의 상당수는 소비의 형태를 취했다. 스파, 명상 프로그램,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에서의 휴가, 정리용 물품, 여기에 더해 약물과 알코올 같은 다른 도피 수단들까지.
미국 건국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질주의적 생활방식에 저항한 시도들을 추적한 <단순한 삶 The Simple Life>에서 역사가 데이비드 시David shi는 분주함이 소비문화의 가장 핵심 문제 중 하나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나 재산, 활동 그 자체는 단순함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향한 사랑, 물건에 대한 열망, 활동의 감옥은 단순함을 해치죠."
격리 기간이 며칠에서 몇 주로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 감옥을 뒤에 남기고 떠나는 듯 보였다. 성취 중심적 사고와 끊임없이 계획되는 업무가 점점 모습을 감췄고, 많은 사람이 안식일을 즐기던 과거의 시민들처럼 더 적은 것을 지니고 사는 기술뿐만 아니라 일을 더 적게 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시간은 두렵게 펼쳐지는 것, 채위야 할 구멍이기를 멈추고, 넓어지고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삶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봉쇄령이 내려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친한 친구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나의 인맥 내에서 최대한 널리 설문 조사를 했다. 그리고 생산성이 점점 피로해진다는 말, 시간 속에 침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한 사람은 이 같은 가장 단순한 말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했다. "앞으론 다시없을 방식으로 봄을 알아차리고 즐길 기회를 얻었어요."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많은 답변이 70년 전 매스 옵서베이션이 묘사한 잃어버린 세계를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어떤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홍미로워요." 한 여성이 말했다. "국토 횡단 열차 안에 있는 느낌, 상호작용의 본질을 떠올리게 해요." 전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몇몇은 격리를 일종의 안식일로 묘사했다.

안식일은 휴전 같은 것이다. 모두가 참여하지 않으면 실재할 수 없는 것. 모두가 일을 멈춰야 한다. 모두가 소비를 멈춰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시간의 형태가 등장해 세상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한다.
가장 즉각적인 변화 중 하나가 지구의 대기에서 발생한다. 소비를 멈추는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해내지 못한 것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구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탄소 오염을 줄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공기가 깨끗해진 것은 다들 집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 정확한이유는 소비경체가 멈춘 것이었다. 공장이 문을 닫았다. 비행기가 운항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쓰기 위해 매일 하던 통근이 중단되었다. 이것이 바로 본질을 꿰뚫은 듯 분명해진 소비의 딜레마였다. 우리 경제의 동력은 소비지만, 소비는 탄소 배출의 동력이다. 이 관계가 너무나도 견고해서, 기후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둘 중 하나의 성장을 다른 하나의 성장 지표로 삼았다. 유행 주기가 가속화되면 기후변화도 가속화된다. 크리스마스에 돈을 덜 흥청망청 쓰면 그해 대기에 진입하는 이산화탄소 분자 수도 적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정치 지도자들은 소비의 규모를 줄임으로써 기후변화에 대응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문제는, 구소련에서나 팬데믹 동안 나타난 수준의 경기 후퇴가 수백만 명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긴다는 것이다. 라슬로 바로는 헝가리가 아직 철의 장막 뒤편에 있던 시기에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했다.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부다페스트는 경치와 분위기가 유럽의 수도에 더 가까웠다. 형가리가 공산주의하에 있던 1980년대에도 바로는 서구 젊은이들처럼 자유롭게 <스타워즈>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었다. 물질적 번영의 측면에서 많은 형가리인은 자유시장경제에 속한 오늘날보다 소련시대에 형편이 더 나았다.
그런데도 소련이 붕괴했을 때 헝가리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직업을 잃었다. 공산주의 하에서는 에너지가 공짜였는데, 소련 붕괴 이후 천연가스 비용을 낼 수 없었던 일부 가정은 장작을 태워야 했다. 헝가리는 다른 많은 소련 국가보다 상황이 나았는데도 소비가 최소 25퍼센트 감소했다. 대침체기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보다 휠씬 심한 추세였다. (중략) 바로가 말했다. "그런 기후 정책은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일부러 그걸 원하는 사람은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현재 바로는 IEA의 수석 경제학자다. IEA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지구 전체가 연간 탄소 배출량을 감축할 전략을 짜는 것이다. 바로는 이런 시나리오들이 전부 녹색 성장을 목표한다고 말했다. IEA는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자진해서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기후 오염과 끝없는 경제 성장을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기고, 경제를 '탈성장'하는 것(계획 하에 경제 규모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저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당신의 소비를 줄일 것입니다'라는 공약으로 민주 선거에서 승리한 국가를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바로가 말했다. "우리는 인간 본성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따랐어요."
 
2020년 IEA는 기후변화를 막는 데 필요한 조치와 비슷할지도 모를 새 시나리오를 제안했다. 이 새로운 비전은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또는 그 근처까지 줄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고 재생 가능 동력원을 사용하고 비행기 대신 기차를 이용하는 등의 변화를, 지구 사회를 재창조한다는 말로밖엔 표현할 수 없는 규모와 속도로 이행해야 한다. 2030년에는 총 배출량이 45퍼센트 감소해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감소가 온전히 경제 성장과 환정 파괴를 분리하려는 노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꾸준히 증가한 에너지 수요는 2006년 수준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2006년의 세계 경제 규모는 2030년 예측 규모의 절반이었다. 석탄을 태우는 비율은 1970년대 수준으로 낮아져야 하는데, 1970년대에 세계 인구 수는 지금의 절반이었다.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상생활의 변화로는, 2020년대가 끝나기 전까지 한 시간 미만의 비행을 전부 금지하고, 3킬로미터 미만의 이동(많은 도시 내의 이동)에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저탄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있다. 전기차의 연간 판매량은 거의 2000퍼센트 가까이 뛰어야 하고, (아마 가장 상상하기 힘든 것일 텐테) 여전히 자동차
로 이동할 때는 낮아진 제한속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에 더해 훨씬 훨씬 더 많은 조치를 실제로 이행한다면, 목표를 달성해 정말 위험한 지구온난화를 예방할 수 있읍지도 모른다.
물론 2020년에 약간의 '좋은' 소식도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전 세계적 경기 침체로 에너지 수요가 줄면서,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발생하기 전의 예측보다 배출량이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IEA는 소비경제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일축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에게는 지난 30년간 계속해서 실패해온 것보다 더욱 극단적인 기술·문화적 변화를 급속도로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물건 구매를 약간 줄이자고 전 세계 시민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여전히 더 타당하다.
바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5000년간 사람들이 기꺼이 소비를 줄였다는 역사적 증거는 극히 희박합니다."

광공해가 미치는 영향의 또다른 사레가 있다. 때는 6월 말이고, 광활한 이리호 위로 해가 저물고 있는데 기상레이더가 어둠 속에서 급속도로 크기를 키우고 있는 불길한 구름을 감지한다. 그때 구름이 클리블랜드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지역 방송의 뉴스 진행자가 이런 트윗을 올린다. "오. 마이. 갓."
그 거대한 구름은 수백만, 어쩌면 수십억 마리의 하루살이다. 좋은 소식은, 인간에게 무해하고 물고기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이 하루살이가 미국 동부의 호수와 강이 독소로 너무 오염되는 바람에 수십 년간 생존하지 못하다 다시 대규모로 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현재 이 하루살이들이 클리블랜드 같은 광공해의 근원지(한 곤충학자는 이런 곳을 '빛 폭탄' 이라 칭했다)를 향해 곧장 날아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들은 조명을 받은 아스팔트와 주차된 차들을 달빛이 비친 수면으로 오해해 마른땅에 헛되이 알을 낳고 죽는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조명이 전 세계 매우 다양한 생물종의 개체 수 감소를 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세계보건기구는 인간의 수면장애가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파악했으며, 다른 연구 결과는 광공해를 우울과 비만, 그 밖의 다른 건강 문제와 관련짓는다.

 

- J.B. 맥키넌, THE DAY THE WORLD STOPS SHOPPING/디컨슈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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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차별의 악순환 끊는 차별금지 조치가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유엔 보고서 발간

 

<이채윤 / 아랫마을홈리스야학 교사, 홈리스행동 번역팀 활동가>

작년 11월 30일, ‘차별 없는 의료실현’을 주제로 열린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의원회관을 방문한 홈리스 당사자가 입구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다. 방문증 작성, 신분증 제시 등 출입을 위한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국회의원회관 측은 홈리스의 복장을 문제 삼았다. ‘행색’을 이유로 한 차별이었다.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인 빈곤
적절한 주거가 없는 홈리스 상태는 단지 물리적인 집의 결핍이나 부재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국회 출입을 제지당한 홈리스의 경험에서 드러나듯 ‘이상한’ 혹은 ‘더러운’ 행색은 차별의 빌미가 된다. 이러한 차별 조치는 홈리스 상태가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씻기 어려운 조건임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거리홈리스가 들고 다니는 무겁고 방대한 짐 역시 차별의 이유가 되곤 한다. 홈리스의 짐은 ‘집 없음’을 드러내는 표지이자 그 자체로 그의 집이다. 그러나 홈리스의 짐은 주거 지원 등 적절한 개입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이들을 방치하고 내쫓을 빌미로 작동한다. 이처럼 홈리스 상태는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빈곤과 차별의 연결 고리를 지적하고 이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빈곤한 상태는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의 부족으로 치부되고, 능력에 따른 차별적 조치는 일면 정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빈곤이 차별의 원인이 되고, 차별이 다시금 빈곤을 낳는 구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홈리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모자라다.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UN 보고서 발간
지난해 7월 15일, UN 극빈과인권에관한특별보고관(올리비에 드 쉬테)이 보고서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빈곤철폐를 위한 핵심수단>을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는 빈곤층의 권리 보장과 빈곤철폐를 위해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구체적으로 보고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가 차별과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빈곤과 차별의 연쇄를 끊기 위해 ‘적극적 평등화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비롯해 포괄적인 ‘반(反)차별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제도 역시 홈리스에 대한 형벌화 조치에 근거해 홈리스를 통제하고 처벌하고, 분리하는 등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철도시설 내 노숙 행위를 금지행위로 정하는 <철도안전법>은 홈리스 퇴거조치의 정당한 빌미를 제공한다. 차별을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법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법체계 자체가 어떻게 가난한 상태를 차별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포괄적인 반(反)차별 체제 구축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 필요  
보고서는 사회경제적 취약성으로 인한 차별에 대응하는 반차별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공공기관의 결정과 그로 인한 영향이 차별적이지 않은지를 살피는 것뿐 아니라 고용주를 비롯한 민간 기관 행위자의 차별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지불 능력이 없어도 필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공공영역의 의무’로 명시한다. 법적으로 차별 사례와 차별금지 사유를 폭넓게 해석하는 것 역시 중요하게 다뤄진다.
 
겉으로만 중립적인 간접차별에 대응해야
포괄적인 반차별 체제는 “겉으로만 중립적인 기준과 절차”로 인해 벌어지는 간접적인 차별에 대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행정상 주소지가 없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을 비롯한 여러 복지서비스 접근권을 제약하는 것은 간접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다. 간접차별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빈곤층에게 불균형한 영향”을 미친다. 절차상 주관적 평가가 개입될 여지가 클 경우, 편견과 고정관념을 근거로 불이익이 가해질 수도 있다. 억양이나 옷차림, 말투, 비언어적 태도 등 소득이 낮은 배경을 드러내는 특성이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복지제도의 시장의존도가 높을수록 간접차별의 위험은 더 커진다. 예컨대 공공임대주택의 공급보다 민간 임대시장 임대료 지원에 방점을 두는 한국의 주거복지 제도는 홈리스가 집을 구하고 거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차별의 교차성을 고려해야
차별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교차적으로 발생한다. 보고서는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성별, 장애 등 다른 지위와 결합할 때 차별에 더욱 취약함을 강조한다. 많은 여성홈리스는 남성이 다수인 쪽방과 고시원에서 살며 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이로 인해 여성전용 거처에 거주하기를 원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한 여성홈리스가 여성전용 고시원에 입실하고자 했으나 홈리스라는 이유로 고시원 입실 계약을 취소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곳은 그가 빠른 시일 내에 입실할 수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이는 홈리스라는 이유로 입주를 거절당해야 했던 차별이자, 여성홈리스의 경험을 교차적으로 포괄하지 못한 제도적 실패의 사례다.
 
악순환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취약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해 빈곤과 차별의 악순환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해당 보고서는 빈곤과 개개인의 지위를 빌미 삼는 차별 경험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보탠다. 
 
빈곤과 차별의 맞물림은 곧 일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것과 물리적인 조건을 바꾸는 일이 함께 가야 함을 의미한다. 차별을 차별이라 말하는 것에서 출발해, 함께 빈곤-차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조건을 질문해나가자.  

 

 

그놈의 합리성, 꼴도 보기 싫어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 그리고 ‘합리적’ 무정차라는 공공의 폭력 

<민푸름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새해 첫 월요일 아침부터 삼각지역을 찾았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지하철행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에는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길을 가로막아 삼각지역에 가지 못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수백의 경찰들과 서울교통공사보안관이 승강장마다 배치되고, 일렬로 늘어서 경찰방패를 들고 휠체어 이용자들을 비롯한 모든 지하철행동 참여자들의 지하철 승차를 막는다. 나중에는 아예 열차를 ‘무정차’ 통과시킨다. 실제로 전년도 12월부터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행동에 대응하여 지하철행동이 진행되는 역사에 열차가 멈춰 서지도 않도록 ‘무정차’ 통과시키고 있다.

언론은 보도한다. 지하철을 타려는 전장연과 타지 못하게 막는 서울시 사이의 갈등을. 그러니 지하철행동이라는 ‘전술’과 이에 대응하는 시의 ‘조치’에 방점이 찍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말한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도 너무하지만, 그래도 더 나은 전술이 필요하지 않겠어? 장애인권리예산 확보도 장애인권리보장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더 합리적인 전술이 있을 거 아냐. 나는 이런 요구를 종종 생각한다. 투쟁의 방식보다 이유에 더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게 아니다. 그보다 어떤 운동이나 투쟁이 이성과 합리성을 무기로 경합해야 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지향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더 나은 전술을 찾아보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는 경제학 교과서 어딘가에 나와 있을 것 같은 모범 사례가 떠오른다. 합리적인 요구를 합리적인 전술로 촉구하면, 시민들은 동의하고, 나아가 합리적인 정부와 지자체는 요구안을 검토하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단계적으로 시행할 것을 구분하여 결국 가까운 미래에 그 요구안은 관철될 것이라고. 그게 바로 협상이고, 그런 협상이 운동의 성패를 결정할 거라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묻고 싶어진다. 당신이 경험한 정부가, 국가가 정말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대인지.

 

작년 1월 서울역사 안에는 서울교통공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었다. “엘리베이터 내/외부 대소변 금지, 엘리베이터 내/외부에 대소변을 보는 노숙인 발견 시 역무실로 신고 바랍니다. 적발 시 CCTV 확인 후 고발조치 예정.” 비슷한 일이 재작년 12월에도 있었다. 혜화역에서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이 진행되던 당시에 혜화역 승강기가 원천 봉쇄됐다. 봉쇄된 승강기에는 이러한 안내문이 혜화역장의 이름으로 붙었다. “금일 예정된 장애인단체의 불법시위(휠체어 승하차)로 인하여 이용시민의 안전과 시설물 보호를 위하여 엘리베이터 운행을 일시 중지합니다.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혜화역장)”


지하철행동 현장에서 나는 보았다. “왜 남의 직장에 와서 행패냐”며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던 공사 직원,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참여자들에게 “어차피 그래봤자 못 타는데”라며 동료와 낄낄 웃던 경찰, 내 귀 바로 옆에 앰프를 대기에 치워 달라 하자 “에베베베”하며 조롱하던 공사 직원, 야유하며 지나가는 시민에게 “경찰이 못하는 말 대신해주셔서 감사하다”던 경찰.

 

안내문이든 집회 현장의 언행이든, 공공의 이름으로 동료시민을 협박, 위협, 분리, 배제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엘리베이터 봉쇄, 탑승 저지, 무정차라는 발상이 경찰과 공사 직원 개개인의 수행과 안내문으로 역 안에, 승강장 앞에 시현되기까지, 나는 이것이 어떤 합리적인 고민의 과정을 거친 건지 모르겠다. 찰나라도 합리적인 고민을 했다면 싫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괘씸한 날 것의 감정들이 그 자체로 공공의 조치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고, 안내, 규제와 같은 조치가 사적인 대응 이상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잠깐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혐오가 공적 언행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되묻는다. ‘합리성’의 언어가, 그 조치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가리고자 동원되는지 아느냐고. 누군가 그 조치를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실은 그 배후의 지극히 감정적인 의도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냐고. 

나는 묻는다. 어떤 감정들이 어떤 조치와 행동을 낳았는지, 어떤 감정을 가리기 위해 합리성이라는 말이 동원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동료 시민들을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만든 데에 합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동력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는 요청한다. 합리성이 아니라 현장을 날뛰는 감정들에 주목해 달라고. 감정을 죽이고, 치우길 요구하기보다 어떤 감정이 이곳에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 생각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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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냥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르기를 강요할 뿐인 경우가 너무 많아요."

내가 시카고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던 당시, 폴란드 출신 인권 변호사로서 폴란드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1989년에 고국의 새 헌법 제정에 참여한 바 있는 빅토르 오시아틴스키가 초빙교수로 와 있었다. 키가 작고 불룩 나온 배에 발그레한 뺨을 지닌 그는 새끼손가락에 조그만 루비가 박힌 인장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빅토르는 '입헌정부는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때 그가 내놓은 답이 놀라웠다. 그는 입헌정치란 권력 분립도 아니고, 사람이 아닌 법을 통한 지배도 아니며, 그밖에 우리가 배워 온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했다. "입헌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복종과 반란 사이에서 가능한 한 많은 선택지를 생성해 내는 정치 형태를 가리킴니다. 입헌주의 체제는 이 둘을 양극단에 놓고, 그 사이에 최대한 너른 공간을 펼쳐 놓습니다. 이 말은 곧 독재란, 인민에게 위반 아니면 복종이라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선택만을 허용함으로써 이견의 여지를 없애 버리는 체제임을 의미합니다."

교도소 대학은 교육에 관해서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관해서도 거의 모두가 마음에 품고 있는 한 가지 질문, 즉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내 목표는 기존의 지지자들을 흡족하게 하는 것도, 회의주의자를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 나는 교도소 안에 자유교양대학을 세우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옹호자 입장에 서서 쓰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또한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이 일에 내재하는 복잡성을 드러내려 애썼다. 교도소 대학에 참여한 학생은 거의 다 중범죄로 형을 받았고, 죄목은 대부분 폭력이었다. (절대적 정당성을 갖고 대량 구금을 비판하는 이들은 폭력 범죄에서 비롯하는 윤리적 정치적 복잡성을 무시하거나 최소화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을 보인다.) 한편, 나는 거의 모든 처벌 형태가 불행히도 거울을 비추듯 대상자에계 폭력을 되돌려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발을 들여 본 교도소는 죄다 인종적 계급적 불평등을 영속화하고 강화하는 폐기물 처리장 같았다. 그 결과 교도소는 이 시대 가장 중요하고 널리 퍼진 공공기관으로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좀먹고, 본래 복무해야 할 대상인 공화국에 위해를 가한다.
처음 교도소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논란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교정 체계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공직자와 직업공무원 중에, 더 나아가 일반 시민 중에 대학 및 중등 이상 교육과정을 끈질기고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직 모른다. 반대로 재소자가 그런 기회를 누리는 데 분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대체로 정확히 인지한다. 내 경험상 재소 학생들은 유독 그런 비판을 놀랄 만큼 예민하게 감지하곤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얻으려고 자신이 쏟은 노력, 원칙과 정책 차원에서 대학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입장과 별개로, 비판자의 논리를 이해하고 일부는 동의하며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생들은 오래 미뤄 두었거나 좌절당했던 의지를 되살리거나 깨닫기 위해 개인적 투쟁을 치르며, 반항심과 냉소주의, 소외감을 주로 불러일으키는 기관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소중한 무언가를 돌보고 키우는 데에 몰두한다.

특정 영역에서 훈련받는 대신에 대단히 깊고 폭넓은 열정으로 자유교양학을 공부한 바드교도소사업단 졸업생들이 현재 다양한 분야, 사업, 직업군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편, 출소 전에 우리가 협력자들과 함께 개발한 혁신적인 자유교양학 후속형 직업훈련을 이수한 학생들은 해당 분야에서 활발히 경력을 쌓고 있다. 바드교도소사업단 졸업생 중 출소 후 취업률은 65퍼센트에서 80퍼센트 사이로 나타난다. 일회성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러한 만큼, 집중적이고 수준 높고 장기간에 걸친 자유교양학 공부와 장래 '업무 현장'에서의 성공 사이에 강력한 연관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금의 시대가 야기한 추가적인 장애물은 차치하더라도, 교육이 아니었다면 졸업생 중 상당수가 최악의 실업률과 소득 저하에 직면했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지내기가 점점 편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다시 이 공간을 불편하게 느낄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고, 그 결과 대학에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인종화한 교도소 공간과 관련해, 그 안에서 활동하는 바드교도소사업단의 입지는 대단히 복잡하다. 학생이 자기 삶과 사회에 대해 사려 깊은 비판을 가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자유교양대학으로서 바드교도소사업단의 사명 중 하나다. 따라서 미국, 특히 교도소에 내재하는 불평등의 인종적 속성에 대항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교육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그리고 이와 관련한 여러 이유로 인해 교도소 안에서 자유교양학은 독특한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학문기관들은 오랜 시간에 결쳐 인종 및 여타 불평등의 재생산에 있어서 고유한 역사적 현재적 역할을 맡아 온 당사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교양학이란 이처럼 특정한 평등주의적 또는 해방적 활동,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광범위한 교육적 포부를 받아안을 뿐 아니라 뛰어넘기도 하는 학문이다.
교도소 대학은 미국 고등교육의 사명과 질을 드높이고 건강한 관계와 기회, 성장을 경험할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수감자의 인간성을 옹호하는 한 가지 방안이다. 그러나 대량 구금 문제에 대응하려면 근본적으로 양형 방식을 개선하고 처벌의 목적과 정당성을 인종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법과 문학'은 내가 바드교도소사업단에서 전국적으로 유사한 교육과정을 연결하는 작업 같은 여타 업무에 더 깊이 몰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행한 강의 중 하나였다. 강의 전반에 결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세밀하게 읽어 나가면서, 책이 기반한 19세기의 시대적 배경과 상징 구조, 도스토옙스키가 내적 대화와 외적 대화의 끝없는 연쇄라고 가정한 의식과 양심 사이의 상호 작용을 보여 주기 위해 복잡하게 얽어 놓은 장치들에 주목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입법부부터 미국 교육부와 주요 쟤단에 이르기까지, 교도소 대학을 교육이 아니라 교정 정책의 산물로 바라보는 경우가 여전히 너무 많다. 자유교양학은커녕 더 폭넓은 고등교육 기회 제공이라는 목표도 아닌, 형사사법적 지표에 근거해 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평범하게 과거 일을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상당히 짤막한 회상에도 아주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입학 면접 중이라든지, 강의실 밖에서 편하게 스쳐 지나가는 도중에 학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교육은 꼭 받도록 해. 그건 누구도 절대 네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니까." 문득 나는 내 가족 중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가족 역시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에는 수 세대에 걸쳐 고질적으로 이어 내려온 상실과 박탈의 경험이 서늘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역에서 교도소 페지주의 운동가를 포함해, 솔직히 말해서 개혁주의적이고, 민간기금으로 운영하며, 선별적으로 입학 절차를 진행하고, 내부 교과과정을 재정치화하기를 거부한다는 동 수많은 이유를 들며 바드에 분개하는 활동가를 많이 만났다.

작게는 획기적인 순간이랄 게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수감 생활은 길고 힘겨운 여정이다. 단조로운 환경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생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하는 역사를 박탈당하는 위험이 처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감형된 사형 선고처럼, 살아 있되 단지 나이만 먹는 존재로 그저 머물러 있는 거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따금 유난히 젊은 외모를 유지하던 장기수들이 갑자기 몇 년을 건너뛰며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이 든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볼 때면 괴상한 방부제처럼 작동하는 교도소가 새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이 교도소와 대학 양쪽의 요구에 균형 있게 대응하기 위해서 끝없는 규칙과 장애물의 미궁 속에서 협상을 벌여야 했던 그 조건이, 내게는 항상 이 교육 기회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매일같이 암묵적으로 얼마나 많은 요구를 그들에게 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지로 느껴졌다. 분명 학생들에게는 그런 독촉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다음은 조지프가 보내온 답장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대니얼. 역할 반전 축제는 암스테드 박사님의 '국민의 형성' 수업에서 나온 것이었죠.
제가 이해하기로 역할 반전 축제란 권력자가 노예에게 정부를 구성해 보라고 자리를 만들어 주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이 행위를 함으로써 노예는 권력자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동시에, 권력자로 하여금 '무력한' 자들의 올분을 풀 기회를 베풀게 해 주는 중요한 기능을 했어요 노예들은 지배층의 모습과 '주지사 선거'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며 케이크워크(19세기 미국 흑인이 백인 상류층의 걸음걸이를 희화하며 추던 춤으로, 백인이 우승한 흑인에게 케이크를 상으로 주어 prize walk라고도 한다)를 합니다.
하지만 그 선거에서 뽑히는 '주지사'는 권력자와 협상할 권한이 있었어요. 날이 저물면 그 권한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데, 언제나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주인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 그날 연설에는 학생들이 축하/졸업 행사가 끝난 뒤에 반드시 권한을 다시 넘겨줘야 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넘겨쥐야 하겠지만, 교도소와 교도소 안에 있는 대학이라는 공간이 지닌 강력한 의미를 우리가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고. 권한을 그저 뒤집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취함으로써 자기결정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졸업식을 조룽하고 우리 자신이 조롱당한다고 느끼는 상황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이에요.

(전략) 교도소는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불평등 재생산 기관이 되었다. 대학은 여전히 중간총과 상류층을 형성하는 기관으로 작용한다. 교도소는 수많은 분석가가 '구금 국가' (carcera state)라고 일컫는 이 나라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감 경험은 미국의 빈곤층,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 가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경험이 사회학자 브루스 웨스턴의 표현으로는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의 생애 주기에서 '양식화된' 체험이 되었다는 점이다.
대학과 교도소는 여전히 우리가 다양한 민주적 자아상을 상상하고 구축하는 장으로 남아 있다. 이 사실이 사회 전체와 그 기관을 통과하는 개인, 관계망,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교도소 대학'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에서 이 두 기관은 특권과 불평등의 재생산에서 나란히 역할을 맡고 있다. 실제로 현대 미국에서 불평등은 상이한 이 두 가지 생애 경로, 즉 한편으로는 대학을, 다른 한 편으로는 교도소를 통하는 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 전통이 갖는 기이한 관련성과 뚜렷한 차이로 인해, 그(윈스턴 처칠)의 발언이 어쩌면 이 주제에 대한 미국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견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내무장관 시절 하원에서 처칠이 한 연설은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범죄와 범죄자 처우를 대하는 대중의 정서와 감정은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피고인, 심지어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자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항할 권리가 있다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인정하는 태도, (....) 치료 및 재생 방안을 찾아내고자 하는 끈질긴 노력, 그리고 찾아낼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보물이 담겨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 이러한 것이 범죄와 범죄자 처우에서 한 나라가 쌓아 올린 힘의 총량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그 나라 안에서 작동하는 미덕의 표지이자 증거입니다.

십 대 시절 라이커스섬에 수감 중이던 이지는 이후 12년을 보내게 될 주 북부 중경비 교도소로의 이감을 앞두고 현실을 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가진 것은 다 잃을 수 있어. 벌어서 얻은 것은 언제든지, 항시 빼앗길 수 있거든. 하지만 배운 것은 달라. 그건 누구도 네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단다."
처음에는 마치 마약을 하듯, 현실도피를 위해 책을 읽었다. 게걸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닥치는 대로 읽어 댔다. 이지가 책 읽기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끈질기고 느리고 집요하게 그러모은 책 더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쓴 이 단어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배운 것만큼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니 배우라고 한 어머니의 언명에 담긴 힘이 느껴졌다.

 

- 대니얼 카포위츠, 교도소 대학(College in Priso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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