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거실에서 애나와 메리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나는 애나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이기적인, 응석받이 같은 질문이었다. 애나가 수용소에 들어간 일, 학대당하고 강간당한 일, 정신지체자 취급을 당한 일, 진흙탕으로 밀쳐진 일, 턱이 부러진 일, 자신의 생식기를 절단당한 일에 관해 듣고 난 다음, 나는 애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 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치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 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애나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론이지. 메리 때문이야.”

                  그것은 농담이었고, 우리 모두를 실수로부터 구해주는 메리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수록, 그 말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그들의 아파트를, 짝을 맞춘 의자와 짝을 맞춘 아이스티 잔을 다시 생각했다. 소파에 앉혀둔 인형, 우리 안에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햄스터, 거기 앉아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두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빈틈없이 돌보는지, 서로의 슬픔을 찰싹 때려 쫓아버리고, 모든 농담을 재빨리 받아주고,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애나는 여전히 메리를 보살피고 있다. 내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애나였고, 메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준 사람도, 화초에 물을 주는 사람도 애나였다. 메리가 무릎이 아파 잘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리와 현재 남자친구인 마이크를 맺어준 사람도 애나였다. 지금은 애나가 체격도 더 작고 겁도 더 많지만, 메리가 이뤄낸 여러 성공들(자식, 손자, 민첩한 유머 감각, 끝없이 이어진 로맨스)을 애나는 갖지 못했지만, 여전히 애나는 메리의 보호자다. 말하자면 지금도 애나는 메리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지구에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 - 중력, 아이스티, 햄스터 - 로 메리에게 설렘과 기쁨을 안겨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메리는 또 어떤가. 거의 모든 말과 반응에서 메리가 얼마나 애나를 고마워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메리는 인형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지지해준다. 메리는 인형의 목에 걸린 색색 가지 구슬로 된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내가 만들었어!” 나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조용히 나일론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꿰며, 친구를 위한 깜짝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메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계속 차를 몰고 가다가 하늘이 어둠으로 통통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들이 또 다른 증거의 가닥들, 그들의 아파트 벽 너머 훨씬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가닥들도 함께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내게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매달 몇 번씩 찾아와 그들을 위해 저녁을 만들어주고, 공과금 납부를 도와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일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또 그들에게 거의 매일 웃긴 문자메시지를 보내주는 메리의 양아들 조시에 관해서도. 또 불임화를 당한 데 대해 애나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해 동안 싸워오고, 결국 2만5천 달러를 받아내주었으며,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버틴 마크 볼드라는 변호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매일 아침 자기 집 발코니에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이웃 그랜트, 그리고 자신들의 ‘수호천사’라는, 아파트 단지의 접수계원 에버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이클론이 그들의 집을 부숴놓았을 때 지금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에버니가 온갖 조치를 취해주었다. 내가 아파트 프런트데스크에서 방문 등록을 할 때 내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알고 에버니의 눈이 환하게 빛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에버니는 프런트데스크 너머 위쪽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애나의 그림들(졸린 강아지, 얼굴을 붉히는 여우)을 가리켰다. 애나와 메리는 아파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늘 자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아끼지 않는다고 에버니는 말했다. 사실 자기는 그런 감사를 받을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수많은 불평불만을 들으며 보내는 길고 힘든 하루 중에 마음 따뜻한 그들을 보는 게 얼마나 반가운 휴식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 – 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스들 – 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 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중략)

                  …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후략)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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