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신의 나라로든, 집단에 대한 헌신을 찬양하며 사람들을 몰고 가는 피리 소리는 불길하고 미심쩍다. 인간 세상에 정답은 없고 현실에서 유토피아는 대체로 디스토피아로 실현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버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돼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법관의 정년은 길고 신분은 보장되어 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판사면 다 판사인 줄 알 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뭐고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된다고 하여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법관의 보수는 호봉제이고 같은 근무 기간이면 다를 것이 없다.

  차이는 단 하나.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차관급 예우'를 받는다는 것인데, 그 '예우'의 실체란 결국 기사 딸린 그랜저 관용차가 출퇴근 때 모시러 온다는 것이 전부다. 이러한 인사제도를 바꾸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도 바로 이 기사 딸린 차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 거다. 나이 오십대 중년들의 사회에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모임에 나타나는 것은 메시지가 다른 것이다. 고위직 판사들이 기사 딸린 차로 나타나다가 어느 날부터 낡은 자가용을 자가운전하여 나타나기 시작하면 청렴한 집단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는 플러스 요인보다 사회적 위상이 예전보다 못한 집단으로 평가받는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외관이 실질을 좌우하는 사회다.

  자본주의사회인데 단순히 돈, 실리에 대한 추구를 넘어 지위재 집착이 심한 사회다. 수직선상 어느 위치에 있느냐, 아니 어느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에 목을 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사업가가 해준 얘기가 있다. 사업가들이 어느 정도 사업에 성공하고 나면 너도 나도 중소기업중앙회장 한번 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한단다. 그런데 그 자리를 하려고 하는 핵심은 '부총리급 예우'이고, 공항에서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별도 트랙으로 앉아 있으면 알아서 누군가 대신 수속을 밟아준다는 것이다. 실리적인 상인 기질을 초월하는 '예우' 선호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과잠' 문화도 정밀해진 대학별 과별 서열의 수직선 내에 자신이 어디쯤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풍조다. 어릴 때부터 입시경쟁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있어 자신의 전리품을 과시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결국 재미있어서 쓰는 것 같다.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내 경우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데서 큰 재미를 느낀다. MRI 같은 거다.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소재)에 대해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글을 써봐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적어둔 글을 나중에 읽는 재미가 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 더해지면 더 재미있다. '유체이탈' 증세가 선천적으로 극심한 편이라 어느새 다른 이들과 같은 쪽에 서서 내 글을 관찰하기도 한다. 이건 재밌고 이건 지루하군.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하다.



  육십대 노신사가 간통 현행범으로 붙잡혀왔다. 상대방은 오십대 후반의 여성. 우연한 재회 후 만남을 이어온 고향 마을 첫사랑이었다. 증거로 제출된 사진 한 장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심부름센터를 동원하여 남편의 뒤를 밟던 부인은 경찰관을 대동하고 여관방을 덮쳤다.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들의 구둣발이 쏟아져 들어온다. 놀란 노신사는 발가벗은 채 이부자리에서 일어난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노신사는 상황을 깨닫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방 한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서 있다. 자수성가하여 지역사회에서 봉사와 자선 활동을 끊임없이 해온 한 개인은 거기 없었다. 그저 플래시와 구둣발 사이에 무력하게 놓여 있는 고깃덩어리 한 덩이만 있었다. 주름진 얼굴, 튀어나온 배, 축 늘어진 치부.

  인간의 내면에는 강제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밀실이 있다. 국가형벌권의 대상이 된 자에게는 그 밀실이 허용되지 않는다. 광장에 내걸릴 뿐이다. 그래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모든 것을 형벌로 다스리는 곳에 법은 있으되 개인은 없다.




<행복도 과학이다>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 성격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에게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핵심 과제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생존과 번식에 가장 필수적인 자원은 동료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활동, 즉 동료 및 이성과 어울리는 활동을 할 때 뇌에서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어 이를 촉진시키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서은국 교수가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행복의 메커니즘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덤더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심오한 인생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물체의 기본 메커니즘인 적응 때문이다. 한 번 맛있는 먹이를 먹었다고 영원히 동굴에 누워 그 즐거움만 만끽하다가는 굶어죽는다. 다시 사냥을 나가도록 등을 떠밀려면 지나간 쾌감은 잊고 새로운 쾌감을 좇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백억 원의 복권 당첨자 집단에 대한 추적연구 결과 불과 1년 뒤에 이들의 행복감은 주변 이웃 수준으로 복귀했다.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행복 전략에 있어 큰 것 한 방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심리학의 연구 성과다.


예전 국민학교 졸업식에서는 전교 일등만 몇 번씩 단상에 올라가 온갖 상을 독식했지만, 요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책읽기상, 친구돕기상, 달리기상, 오만 이름의 상장을 모두에게 인심 좋게 나눠준다.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졸업식일까. 어차피 전교 일등하는 아이는 상장 몇 개 덜 받아도 이후 인생에서 좋은 일이 있을 기회가 많으니 혼자 상장을 독점 못한다고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학교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여러 아이들이 골고루 상장 받을 거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연구 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으로 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 문제가 심각하며 선진국 중 가장 강력범죄율이 높은 미국도 15위로 늘 행복지수 상위권이다.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동아시아 경제 우등생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개인주의자의 소소한 행복>


  직업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은 없고 오해받을 소지는 많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남들은 어떻든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여 재벌 회장들 변호하며 큰돈 버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정말이지 공부라도 잘했으니 망정이지 한국사회에서 먹고살기 힘들 뻔했다.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지인들과의 소모임, 젊은 판사들과의 독서 모임, 수준은 극히 낮지만 연습하는 과정이 즐거운 법원 합창단 등의 소소한 모임이 즐겁다.



  그리스적 전인교육은 노예제의 기반 위에 귀족들에게 적용되었던 혜택이다. 음악, 미술, 체육에 웅변, 논술, 뛰어난 외국어 능력 등 중산층 이상 가정의 뒷받침 없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경쟁하기 힘든 분야의 능력을 자꾸 대입제도에 도입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벌써 신분 이동이 어려운 쇠퇴기의 사회가 되어가는 징표 아닐까 싶어 두렵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내가 칼럼을 쓸 때 가장 울컥하며 써내려갔던 것은 요약하면 결국 '서민 가정 출신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부잣집 애들에게 정당한 기회를 빼앗기는 건 부당하다'는 부분이었다. 인간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나 또한 과거의 나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 기회를 빼앗기는 것에 가장 분노하는 것이다. 물론 계층 이동의 사다리, 공정성 측면에서 이것도 중요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수의 공부 잘하는 아이뿐 아니라 다수의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실 더 중요하다. 또한 사회에는 공부 잘하는 것 외에 다양한 재능이 필요하다. 대학 입시를 봉건시대의 과거제도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은 자칫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 공공의식이 부족한 엘리트를 사회에 오히려 더 큰 해악만 끼칠 수 있다는 것 역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저자('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오찬호)가 꾸리는 독서토론 모임 대학생들의 용산 참사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철거민들의 요구가 과했다!" "무작정 떼쓴다고 될 일인가? 내가 얼마나 지금 노력하고 있는데..." "본인이 그렇게 자영업자가 되었다면 건물이 철거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반응을 보인 학생들은 2년째 대형마트 지하주차장 안내원 알바 중인 학생, 3년째 신문배달하며 취업을 위해 종일 스펙 쌓기 중인 지방대생, 토익을 24회나 응시하는 등 온갖 취업 준비에 몰입 중인 학생 등이다.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수능 점수를 거의 유일한 공정 경쟁의 결과로 받아들여 수능배치표 피라미드에 따른 '학력의 위계화된 질서'에 심각하게 집착한다. '인서울'과 '지방대'에 대한 취업시 차별은 당연한 것이고 지방대도 자기보다 하위권 지방대에 대해 마찬가지 태도를 취한다. 그 배후에는 '타인의 상승'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 문제를 언급하면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간주한다. 사회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는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이십대 시절에 쓴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 나오는 일본 이십대의 사고방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 도쿄 지국장이 노리토시에게 "일본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라고 묻자, 노리토시는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일본 젊은이의 행복은 이렇다.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기본 패션 아이템을 구입하고 맥도날드 런치 세트로 식사하며 친구들과 수다 떨고, 집에선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 채팅을 하고 가구는 이케아에서 구매, 밤에는 친구 집에서 식사하며 한잔한다. 그리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나름 즐겁다.' Wii나 PSP를 구입할 정도 수입은 있고, 이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연인이나 친구가 있다면 대개의 경우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지수는 근래 40년 중 최고치란다. 이에 대한 한 학자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답한다. 일본이 지금보다 더 심각한 격차사회, 계급사회가 되면 역설적으로 행복지수 자체는 올라갈 수도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고도성장기의 버블이 다 꺼진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일본이든 우리든 지난 시대의 기준을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처한 입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 다양한 개인들을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이십대를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로 보는 것도, 모든 것에 달관한 세대로 보는 것도 모두 성급하게 느껴진다. 그저 지금 시대상의 한 단면씩만을 잘라서 보는 것은 아닐는지.

  어린 시절부터 과도한 입시경쟁, 취업경쟁에 내몰려야 했던 젊은이들은 노력의 결과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학만 졸업하면 학점에 상관없이 대기업에 척척 취업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스트레스 속에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보니 위악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도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비록 내 친구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없더라도, 설령 전체 이십 대 인구 중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이 더 많더라도, 분명히 어떤 젊은이들은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 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갖고 있지는 못하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말이 흉기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주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춰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마음은 과학이 분석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 뇌과학은 꿈을 해석하던 프로이트 시대를 넘어선 지 오래다. 물질세계를 다루는 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처럼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 또한 놀랍도록 진화되어 왔다.

  인간의 본성을 진화심리학으로 탐구하는 스티픈 핑커,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토대로 행동경제학을 발전시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도덕감정의 차이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조너선 하이트, 프레임이라는 인간 심리의 작동 기제를 토대로 미국 현실 정치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하여 오바마 당선을 도운 조지 레이코프, 역시 인간 심리의 작동 기제에 관한 과학을 토대로 저항감 없이 인간 행동을 바꾸는 '넛지' 방식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주창하고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규제개혁 책임자로 자기 이론을 현실에 반영한 케스 선스타인.



<정답 없는 세상>


  어느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승리란 존재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상대를 몰살시키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문제의 다층적인 구조를 직시하자고 하면 대뜸 비겁한 양비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양비론 아니라 삼비론 사비론이더라도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재판도 양비론이다. 손해배상 책임을 정할 때 피해자측의 과실도 참작한다. 책임의 비율을 달리할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어느 한쪽만이 전적으로 옳고 전적으로 틀린 경우는 없다.

  아름다운 윤리와 당위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일단 인정하고 그걸 출발점으로 타협할 지점을 찾는 냉정함이 현실적이다.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신념과 분노에만 의지하다가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최악의 결과만 가져올 수 있다.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문명과 폭력>


  스티븐 핑커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이 감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라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착각이 바로 인류의 폭력성을 감소시켜온 원동력 아닐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현재 존재하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증거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 이전에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은 현재 존재하는 비극과 부조리에 강하게 분노하는 것이고, 이 분노와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장기적인 문명화, 평화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아닐까.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통계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며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넘어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혹자들은 이를 비현실적인 호들갑이라고 여기지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범위를 나, 가족, 부족, 계급, 성, 인종, 국적의 범위를 넘어 계속 넓혀온 역사가 바로 인간이 폭력적인 본성과 싸워온 과정이다.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길거리에서 타살당할 염려 없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잠들지 않게 서로 깨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보적이고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이미지는 지식인들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자유,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서유럽적 가치는 엘리트, 중산층들의 선호이고, 서민들은 윤리적 보수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은 합리적 추론보다 도덕적 직관에 의존하는데, 미국 진보 세력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달시킨 도덕성 중 자유와 배려에만 치중하고 정당한 권위, 고결함,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무시해 지지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상대의 도덕감정을 모욕하는 것보다 상대도 공감할 만한 부분을 넓혀가는 것이 현명하다. <샤를리 에브도>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68혁명의 후예다. 그들은 저항의 목적인 휴머니즘보다 저항 그 자체를 더 신성시하는 근본주의에 빠진 것은 아닐까.



  팔짱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일이 있다. Anyone can be cynical. Dare to be an optimist. 



  


  심리학자 폴 슬로빅에 따르면 사회의 다양한 위험 요소에 대해 순위를 매기도록 한 결과, 비전문가인 일반인들이 가장 큰 위험 요소로 꼽은 원자력발전을 전문가들은 최하위로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사고, 흡연이 오히려 압도적으로 보았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위험을 인식하는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망률 통계 등의 양적 지표에 따라 판단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원자력발전소 근처에 거주하는 것이 평소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통계적으로 훨씬 안전하다고 평가하지만 대중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슬로빅에 따르면 일반인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양적 지표보다는 결과의 끔찍함 정도, 자신의 지식 범위 밖에 있는 미지의 정도,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 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한다. 치사율이 높다고 알려진 신종 전염병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한국인이 미개해서 메르스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구조에 기인한 공포인 것이다. ...

  미국 환경청은 화학물질로 인한 위험 정도에 관하여 지역주민과 대화할 때, 대중을 정당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것, 대중의 관심사에 귀기울일 것, 정직하고 솔직하게 정보를 제공할 것 등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의 7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위험에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은 냉철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되,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두려움을 존중하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안심시킬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라는 직업군이 존재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에볼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한 간호사를 백악관에 초청해 포옹하고,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을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대중의 공포는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사회가 보여준 것은 과학적 판단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어떠한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합리적 근거와 소신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들,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함부로 책임자와 대응방식을 바꾸지 않는 뚝심 있는 시스템, 그리고 단 한 명의 자국민도 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연대감을 표시하며 국민을 안심시킨 리더십이다.

  한 사회의 성숙함은 위기 속에서 비로소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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