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정치가 필요한 이유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자기와 관련된 일을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타인들이 마음대로 결정하게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되면 곤란한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민주정치를 근본적인 부분에서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정치를 하는 이유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이러한 자기 통치나 자기 지배에 대한 욕구와 부딪힙니다. 집합적인 결정이기는 해도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 결정에 관여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와 표리 관계를 이루는데, 민주적인 결정에 대해서는 관련된 사람들이 납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른 결정 방식과 비교했을 때, 민주정치에서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비록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결과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결정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쉽고, 결정한 후에도 저항이나 반발이 적습니다. 즉 결정 후의 원활함이라는 면에서는 민주정치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와 같은 '대표되는 자'가 무언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정리된 민의를 '대표하는 자'가 전합니다. 우리 '대표되는 자'에게는 이미 분명한 의견이 있고, '대표하는 자'는 그것을 충실히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대표에 대한 첫 번째 견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어떤 집단이 이미 일정한 민의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디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분명한 의견이 어디에도 없어 모든 것이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대표하는 자가 대표되는 자에게 '이런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며 공작을 해서 우리의 민의가 형성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우리는 A당과 B당이 논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이지만 자신의 생각은 A당에 가깝다며 A당을 지지합니다. 그렇게 A당의 지지자가 늘어나 다수가 되면, A당이 우리 전체의 대표가 됩니다. 이것이 대표에 대한 두 번째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대표되는 자'에게 미리 명확한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어떤 민의를 대표가 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선 누구를 대표로 할 것인가를 우리가 정하고, 그 대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 대표는 일정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대표의 자유로운 판단에 위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에서는 올바름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각자 올바름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중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올바르다고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정치는 가치의 복수성이나 다원성을 전제로 몇 가지의 '올바름' 사이에서 조정이나 타협을 도모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대표들이 의회에서 논전을 펼치거나 정당들이 대립하는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봅니다. 그렇게 지켜보다 보면 무엇이 쟁점인지가 점점 명확해져 그것을 수용하여 우리 스스로 생각해보거나 인터넷에 의견을 올리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논의를 해서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즉 대표란 일종의 배우로서 정치극을 통해 민의의 형성을 돕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치인은 각각의 역할을 연기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논전을 펼치는 정치인들을 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연극은 우리의 사고에 어떤 틀을 덮어씌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연극이라는 틀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정치적인 사고도 가능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적 쟁점이 어디에 있고, 대립 축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의 의견에 가깝고, 어떤 점이 다른가? 대표들이 펼치는 정치극을 보면서 이러한 것들이 명확해집니다. 대표라는 존재가 전혀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정치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것조차 얼마나 곤란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라는 형태로 가장 손쉽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론 신문이나 논단, 최근에는 인터넷상의 논의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위한 전제로 연극적인 장치로서의 대표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장이야말로 고급이고, 사적인 장은 저급하기 때문에 정치라는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은 축출되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이 생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 등이 정치 바깥으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생활에서 불안이 없는 부자들만이 정치에 대해 발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사이분론 때문에 국가권력이 개인의 집 안으로 들어오기 힘든 면도 있지만, 정치의 영역을 지나치게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려 하면 폐해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는 논의의 환경이 실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소리 높여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돈이 있으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설득력 있는 화법을 몸에 익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올바른'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그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결론이 도출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불안의 불식보다 자유를 우선시한다는 자유주의의 주장은 그 자명함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토론을 추진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정치는 선악을 논하는 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올바른 답 이외에는 필요 없다는 자세는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치의 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은 정치가 기능하는 장을 없애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SEIJITEKI SHIKOU    정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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