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향으로 온다. 바람이 면에서 선으로 불기 시작할 때 겨울은 감지된다. 길고, 얇고, 뽀족해 콧속에서 와르르 산산조각이 나는 겨울바람에서는 차가운 결말과 냉랭한 시작의 냄새가 난다. 붙잡지 못한 시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계절. 시간이 눈처럼 따뜻할 일은 없다. 나는 빨개진 코끝을 만지며 걷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얼음이 뼈와 살과 근육을 다 통과해버린 것 같다. 젖은 발밑을 바라볼 때마다 눈 위로 흐른 얼음물이 코끝으로 툭 떨어진다. 나는 그 어느 겨울에도 그 어떤 시간도 다 녹이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매해 겨울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매번 불완전한 정산 내역을 받아 들었다. 올해의 결말은 늘 실패였고 새해의 시작은 잔인할 만큼 빨랐다. 너는 네가 원한 것을 절대 가질 수 없다고 겨울은 이야기했다. 네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시기는 예전에 나버렸다고 그는 선언했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그 차가운 공기가 좋았고, 동물들도 사라져 조용한 풍경이 좋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움켜쥐는 것이 좋았고,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이 좋았고, 연말의 흥성한 분위기가 좋았고, 크리스마스의 예쁜 장식이 좋았고, 눈을 밟는 소리가 좋았고, 모두들 할 일을 내년으로 미루며 반쯤은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 그렇게 맞이한 새해도 그다지 부지런하지는 못한 것이 좋았다. 그 따뜻한 분위기가 내 것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겨울에 가장 외로워하면서도 가장 사람들 속에서 산다고 느꼈다. 앙상한 나무에조차 짚으로 된 옷을 둘러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린 발을 녹여가며 겨우 잠이 들 때엔 누군가가 나에게 위로를 둘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 그가 겨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겨울과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절망시키면서도 동시에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겨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대학교에서 이중전공으로 칠학을 선택하기까지 늘 철학의 영토 주변부를 맵돌았다.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철학을 더 공부하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보다 큰 그 무언가에 나를 바치고 싶다는 생각, 그리하여 그 거대한 생각의 제전 속에서 웅크릴 자리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철학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조사하고 글을 쓰는 과정은 삶의 다른 가능성을 기꺼이 잠시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했고, 철학의 부름은 무슨 짓을 해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삶의 조건과 삶의 근거를 가장 깊은 곳에서 탐구하는 학문. 지적 자산에 대한 존중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 나와 다른 이의 삶을 돌아볼 때의 철저함에 평생 끌려왔다. 대학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읽으며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어느 오후나 항연 속 애지자로서의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받았던 감동의 순간은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흥미 때문이라면 혼자 책을 읽으며 공부하면 그만이지. 대학원이라는 형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철학을 취미로 읽는 것과 학계 안에서 지적받으며 공부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배우고 비판받고 읽고 쓰고 싶었다. 혼자 읽고 마는 게 아니라 같이 읽고 확인하고 교정받고 싶었다. 제멋대로 읽기 쉬운 철학 텍스트를 엄정하게 읽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생각을 다듬으며 쓰고 또 쓰고싶었다. 규칙적인 수업을 들으며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싶었고, 이해가 되지 않아 포기하는 대신 과제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었다. 한 텍스트를 읽기 위해 필요한 다른 텍스트들을 추천받고 싶었고 하루를 다 써서 그런 책들을 읽고 싶었다. 열 중 둘은 내가 이런 것들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학원을 권했다.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나는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쓴다. 더 이상 세상을 생각하며 울지 않지만 세상의 무한함에 여전히 매료된다. 세상을 보는 안경들은 내내 흥미롭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땅을 더듬어가며 짐작해본다. 나의 쓰임이 이곳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어림해보며. 삶에 저울이 있다면, 저울이 있어서 불안이며 열정이며 경력 같은 것을 놓고 셈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저울은 큰 바다를 향해 힘껏 기울었다. 아무도 쓸모를 묻지 않으나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찬 바다로. 이곳에 잠겨 질식하더라도, 나보다 큰 이곳에서 나는 기꺼이 웅크린다. 몹시 행복하다.

학창 시절의 하루하루는 끔찍하리만치 천천히 흘러갔다. 매초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흘러가는 바람에 원래의 몇 배가 되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간절히 라디오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라디오는 오늘 하루가 또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침 6시가 지나면 8시가 온다. 8시가 지나면 10시가 온다. 오후 2시가 지나면 4시가 오고, 저녁 7시가 오고,밤 10시가 오고 마침내 12시가 온다. 라디오는 착실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어 나를 안심시켰다. 그 시간 동안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들이 나와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더 이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없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트위터에서 하루 종일 회자되는 사건이 페이스북에서는 잠잠하고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의 '유행'이란 주류로 분류되는 몇 개의 매체에 동시에 노출될 때에만 간신히 성립하는 총류의 것이다. 그리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 필요하기에 기업이 유행을 주도하기는 더욱 용이해진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해석하며 유행이란 이 종교를 유지시키는 제의와도 같다고 보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화신과도 같은 거대 자본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제의를 계속해서 규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유행이란 동시성의 감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만들어진 감각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고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만큼 섬똑한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반대로 모두가 획일화의 틀에 간힐 것임을, 결국 그 들을 깨야 할 것임을 줄줄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바라건대 그리운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DJ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또 한 번 돌아오는 하루의 짐을 조금 나눠 질 수 있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다.

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책으로 진입하는 머리글을 읽을 인내심과 스크린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두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합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품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요약된 소설과 압축된 영화와 후렴만 있는 음악은 심장에 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

꼭 예술로 뮌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론은 타당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이 된다.
바라건대 진심으로 경청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판단을 잠시 멈추는 사람들의 세계, 상대방의 삶에 자신의 상을 욱여넣으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복잡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세계. 세 줄 요약만 듣고 홀연히 사라지지 않는 이들의 장황한 말을 듣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물화되지 않는 소중한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므로 우리는 고전 다이제스트와 '절말 포함 줄거리'와 '후럼구 모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다못해 친구의 말조차 세 시간 이상 듣는 일이 적은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예술 경험일 것이다.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혼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수전 손택의 그 유명한 말대로 사진을 찍는shoot 일은 총을 쏘는shoot 일과 같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전혀 본 적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절대 가질 수 없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그것도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어떤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내 마음대로 사각형의 모습으로 재단하는 일을 멈춘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담아두고 싶다는 큰 욕망보다 내 삶만을 복기하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상한 타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던가?

내가 세상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반대로 나를 완전히 비우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폭력적이지 많은 진실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인물을 채우는 일에 지쳐 연기로부터 떠난 사람을 알고 있다. 완전한 이해 역시 "살인의 승화"일 수 있다. 아까와는 반대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공감은 나와 타인이 분리되어 있고, 상대방이 적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의식 상태- 최소한 상대방이 무생물은 아니어야 하니까 -를 지니고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완전히 이해받길 원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죽이고 완전히 타인에게 공감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자기계발서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자기계발서가 홀로 닫힌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 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 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 말 것. 부정하지 말 것. 속삭이지 말 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이런 입장을 패배주의라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건 다 배부른 소리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그 모두에는 당연하게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사회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도, 배를 곯는데 노래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도 타당하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타당한 그만큼 삶은 노래해야 한다는 말 역시 타당하다. 삶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말도,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또한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어코 혼자 올라가야 하는가? 만약 모두가 죽도록 힘들지 않아도 아무도 배를 곯지 않고 다 같이 노래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을 지지할 텐가? 이 말이 불온하게 느껴진다면 그는 그 누구보다 지금 이곳에 강력히 뿌리내린 자다.

'고향 없는 인간'. <책의 말들>의 에필로그에도 썼듯 나는 땅에 발붙이지 않은 모든 이를 스승으로 여긴다. 고향이 없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처한 세계를 뒤집어보는 사람, 그래서 오로지 인간과 지구에게 더 나은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뒤를 한 걸음 뒤에서 따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라고 말하는 책보다 나를 멀리 데려가는 책을 원한다. 내가 아닌 사람,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때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그래서 나의 오래된 시야도 생각도 감각도 재편해주기를.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겪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해주기를.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실제로도 이곳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과 100년여의 변화를 통해 질서 지어진 세계이며, 나의 생각은 불과 30년여의 경험을 통해 구성된 산물이다. 삶의 근본적인 조건은 한 번도 당연했던 적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눈앞에 닥친 기후 위기를 목격하는 중이니 머지않아 또 다른 질서를 만들거나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아무도 그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 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지평은 너르게 펼쳐져 있다. 과거의 누군가가 시도해본 삶. 지금의 누군가가 상상하는 세계.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언젠가의 어딘가. 책 속의 그 무한한 감정과, 도시와, 길과, 본 적 없는 신체와 오래된 시와 슬픈 미래의 기억들... 그리고 아마 우리는 폭염과 태풍과 폭우와 해수면 상승을 향해 가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세게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한 조언보다는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재난과 불안한 시국에서 서로를 믿기, 인내하기, 발맞추어 걸어가기.

책들 사이에서 왜 방황하는가? 왜 어떤 책을 집어 들다 말고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가는가?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나'가 아닌 모든 것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다가올 세상과 모르는 감정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될지 저런 사람이 될지 이런 세계에 방문할지 저런 삶에 틈입당해볼지를 고민하고 고민하며 하루의 1/48가량을 기꺼이 쓴다. 그중 어떤 책도 한 권으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한 권이 다른 모든 책을 장악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책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불완전한 상상의 파편들 중 하나를 최선을 다해 고른다.

완전한 최후의 한 권을 찾는 사람에게 책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매체다. 한 권의 책이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라"고 말할 때 다른 어떤 책은 "인간이라면 저렇게 살라"고 주문한다. 둘은 책의 세계에서 맞부딪힌다. 인생에 한 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유일한 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삶에 최후의 정답이 없는 만큼이나 책에도 최후의 성배란 없다(물론 최후의 성배로서의 책이 존재하는 세계를 다룬 책은 있다).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맞부딪히는 주문 속에서 "인간이라면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라"라는 주문은 유일하게 힘을 잃는 주문이 된다.

완벽한 삶이란 없듯이 완벽한 책이란 없으며 그렇기에 닫힌 삶/책이란 없고 우리는 늘 다음 삶/책을 지나쳐갈 뿐이다. 내일의 삶/책, 그다음의 삶/책, 다가오는 삶/책들을 그때그때 파도 타듯 넘어서면서, 예기치 않은 바닷물을 기꺼이 꿀꺽꿀꺽 마시면서. 누구의 삶에서나 남은 시간은 늘 줄어들고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삶/책을 받아들이며 열린 세계의 자녀로 남아야만 한다. 마음의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그리는 과정의 한중간으로서.

어쩌면 그 과정에서 몇 권의 자기계발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위험 속에서 다른 이를 배려하는 법,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법, 살아남으며 존엄을 지키는 방법, 서로에게 친절을 유지하는 방법...

 

스무 살 이후의 삶은 흔한 표현을 빌려 '덤으로 주어진 삶'이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므로 미래를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10여 년의 시간을 빠져나가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껍데기에 삶을 바치지 말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삶을 지켜낼 것.

여기서의 삶은 과정으로서의 삶, 매일의 시간, 바로 그것이다. 어딘가 깃발을 꽂아놓고 그리를 향해 달려가느라 도달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다음 몇 초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때에 있으므로 매 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삶, 내가 아닌 부분을 줄여나가고 나인 부분을 늘려나가는 삶,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 삶을 살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매일 또렷이 바라보며 묻는다. 무엇을 원하는가? (스무살) 읽고 씀으로써 살아남고 싶다. (스물다섯 살) 읽고 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서른 살) 읽고 쓰며 인간의 생각의 집에 속한 아주 작은 티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읽고 쓴다.  (중략) 무엇을 원하는가? 인류가 쌓아 올린 생각의 벽돌에 작은 티끌로 남고 싶다. 철학의 황홀경 속에서 살자. 무엇을 원하는가? 사람들이 덜 고통받기를 원한다. 후원처를 늘리고 고기를 먹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가? 죽음 앞에서 진짜 벌거벗은 사람이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원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정면으로 서는 것이 내가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치 운동선수처럼 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했다. 매일매일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핵심을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나의 전문가'가 되었을 때 나는 반쪽자리 삶을 가까스로 살게 되었다.

이십 대를 마치며 기운을 차리고 알게 됐다. 반쪽을 건졌다고 해서 '남의 전문가' 구역을 삶에서 도려내거나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삶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 안에는 수없이 많은 책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으나 내가 분유받은 살아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뚝 떼어다 나눠 주곤 하는데, 그렇게 나눠 받은 사람들의 합이 자기 안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내 안의 목소리는 작고 빈약하다. 내 안의 목소리는 겨우 두어 명 치밖에 안 된다. 다가오는 고통과 비명 앞에서 대차게 호통을 쳐줄 목소리가 그뿐이라, 지겨운 내 목소리를 크게 크게 내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목소리 안에 무수한 책의 목소리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목소리.

 

하지만 몸은 늘 그런 식이다. 세포는 계속 죽고 태어난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된다. 하루에 3300억 개가 교체되고, 한두 해 정도가 지나면 몸 대부분의 세포가 교체된다. 나는 차곡차곡 바꿔온 나의 세포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것들은 결단코 나지만, '나'는 조금씩 바뀌어왔다. 이 '나'는 저 '나'를 향해 착실하게 항해해왔다.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김겨울, 유튜브로 책 권하는 법, 유유, 2019). "계속 무마해 보겠습니다." 무마의 약속은 곧 도전의 약속이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아침 식사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충만의 시간이다. 과일이며 빵이며 하는 간단한 것들을 준비해 책상에 앉는다. 독서대에 끼워놓은 잡지를 책상 위에 올린다. 한 입씩 천천히 먹으며 새로운 것들을 머릿속에 넣는다. 과학 잡지일 때도 있고 철학 잡지일 때도 페미니즘 잡지일 때도 책에 대한 잡지일 때도 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죽음이다. 천천히 먹는다. 음식도 글도 차근차근 머릿속에 넣는다. 아침 바람이 깨운 정신에는 글이 잘도 들어간다. 밤새 굵주리고 허기졌던 몸과 정신이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다. 익숙하고 지겨운 생각이 신나게 박살 난다. 나는 몇 개의 구절을 두세 번 되뇌며 빼먹은 재료 같은 것을 찬장에서 꺼내 온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삶을 두러워하는 사람은 이미 거의 죽은 상태다."" 근사한 철학자들의 문장을 오물오물 씹어본다. 나는 거의 죽어 있나?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았으므로 매일 아침 '작은 죽음'에서 깨어나는 일을 축하할 수 있다. 무사히 깨어났고 깨어난 것에 비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성공적인 부활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비탄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에 대해 잘알고 있다. 아침을 사랑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축하 만찬은 한 시간가량 이어진다.

 

마지막 아침 식사가 언제일지 가능해본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축하 만찬은 1만 8천 번 정도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리지 않고 가만히 늙는다면 1만 8천 번 정도는 작은 부활을 축하할 수 있다. 많으면 2만 번 정도 될 테지만 그 정도의 축하는 필요하지 않다. 그보다 짧게 잡는다면 한없이 짧아질 수도 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아침 식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내가 죽음에 다가갈 수도 있다. 아직은 모를 일이다. '작은 죽음'이 아니라 '큰 죽음' 그러니까 유일한 죽음이 다가오면 지체 없이 맞이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는 아침의 찬 바람이 깨운 서늘하고 명징한 정신이었으면 한다. 매일같이 축하한 작은 부활의 순간처럼 날카로웠으면 한다. 죽음 앞에서마저 미몽에 사로잠혀 있지 않았으면 한다. 무너지게 될까. 포기하게 될까. 신체의 고통 앞에서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어지게 될까. 나는 이토록 허약한데.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완벽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로 한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라고도 생각한다.

다 먹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오늘도 기어코 몸에 연료를 공급하고 정신을 깨웠다. 이 풍요로운 만찬에 어울리는 하루를 준비해본다. 바짝 깬 정신으로 죽기 전 해야할 일들이 있다. 약속들은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웃으며 하나씩 악수한다. 아, 그거면 됐어. 그거면 됐다.

 

"이제 누가 책을 읽냐"는, 조롱조지만 진지한 장문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요지는 학생들의 말과 같았다.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재미는 굳이 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는 것. 책을 읽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다. 책만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 독서 캠프의 강연장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의 일관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적어도 수 시간에서 수 주에 이르기까지, 흐름과 논리를 따라가며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강연을 가도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다. 수 시간은커녕 수십 분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경험이니까. 하지만 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아니, 책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그걸 안다. 

 

경계에 머무르는 즐거움

 

MBTI 척도에서의 J와 P가 상당 부분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니까 J는 계획형이고 P가 즉흥형이라는, 원래의 MBTI 척도(J는 판단, P는 인식이라는 지표로, 엄밀히 말하면 의사결정에 있어 판단을 선호하느냐 인식을 선호하느냐의 차이로 구분된다고 한다)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을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즉흥적이라는 말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MBTI는 책임감을 측정하는 척도가 아니며 게으름이나 성취도를 측정하는 척도도 아니다. 그저 (통용되는 의미에 따르면) 계획을 세우는 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편에 가깝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답일 뿐이다. 나는 계획 세우는 걸 귀찮아하고 일을 종종 미루지만 일에 대한 책임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마감을 기요틴처럼 여긴다. 여행 계획이라고는 '첫째 날: 동부/ 둘째 날: 서부/ 셋째 날: 남부' 정도밖에 없고 뜬금없이 하루종일 위키백과를 읽는 데에 시간을 다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답이 없는 게으름뱅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테 고3은 내가 유일하게 J로 살았던 시기였다. 과목별 1년 계획을 세우고, 그걸 쪼개서 분기별 계획. 그걸 쪼개서 월벌 계획, 그걸 쪼개서 주별 계획을 세운 뒤에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다시 그걸 쪼개서 일별 계획을 세웠다. 혹시나 계획을 못 지킬 때를 대비해 '못 한 거 하는 시간'까지 잡아뒀다. 그날의 투두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면서 공부를 했고 하루가 끝나면 오늘의 성취도와 공부 시간을 스스로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감상: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수능 보고 나서 스터디 플래너랑 과목별 취약 영역 복습 계획 정리해둔 파일을 불태우고 싶었는데 1년 동안 애쓴 걸 존중해서 살려는 줬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그럼게 산 적이 없지만, 글쎄, MBTI라는 게 환경에 따라 바뀐다는 걸 감안하면 취업을 해서 '회사에서만 J인 사람'으로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판단보다는 이해의 도구로 MBTI가 쓰였으면 한다.

 

에밀 길렐스와 베토벤과 하이페츠와 사라 장에게 학창 시절의 일부를 빚지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면서 그땐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벽(기대앉을 수 있는 거대한 벽)의 작은 무늬들을 살펴보게 됐다. 수백 년간 소리의 세공사들이 빚어낸 형태가 조각보처럼 모여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소리의 형태가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벽을 더듬다 보면 왠지 언어도 시간도 세월도 아주 오랫동안 초월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멜키아데스처럼 조용히, 잊힐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짜고 기워도 더 이상 촘촘해지지 않는 언어의 체를 내려놓은 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길 때 질문이 자라난다.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자: 땅은 사고팔 수 없다. 인간은 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자연은 변형할 수 없다. 동물은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네 가지 명제 모두 하나같이 불온한 명제들이다. 아니 어떻게 감히 이런 생각을? 고개를 살짝 끄덕인 사람도, 화들짝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어느 부분도 당연하지 않다. 저 각각의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끈질긴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저 명제들에 질문할 기회를 놓치며 살아간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달리기는 내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하는 경계를 뚜렷하게 알려준다. 내가 이끌고 다녀야 하는 무게를 정확하게 각인시킨다. 코어 근육이 얼마나 단단해져 있는지.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의 상태는 어떤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발을 들어서 옮기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계속 뛰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결코 계속 뛸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는 지금 당장 멈출 수도 있지만 계속 뛸 수도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이 차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오로지 나만이 느리게 뛸지 걸을지 멈출지 결정할 수 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것 역시. 매번 나를 새롭게 알아가고 동네의 풍경을 알아간다. 내가 나를 들고 뛰기. 왠지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advent calender

 

 - 김겨울, 겨울의 언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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