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다. 빈 상자를 버리지 못하고 가위로 잘라 꼭 무언가를 만들곤 했다. 조립식 장남감도 좋아하고 과학상자도 좋아했다. 그러나 십 대가 되고 입시 전쟁을 거치며 그런 일은 '쓸데없는 땃짓'이 되어 버렸다. 심야 라디오방송을 녹음한 테이프에 정성껏 라벨을 붙이면서도 항상 길티 플레저를 느끼곤 했다.

나는 요즘도 손으로 악보를 그리거나 메모를 하는데, 효율보다는 좋아서 하는 이유가 크다. 만드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효율적일 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하면 일단 과정이 즐겁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쉬운 작곡이나 글쓰기에 구체적인 감각을 더해 준다. 추가된 멜로디를 악보에 써두었다 가위로 오려 기존 악보에 붙이기, 메모지에 각 장의 제목을 써서 창문에 이리저리 붙여 가며 책을 상상해 보기. 모두 20세기 전반에 걸쳐 창작자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방식이다.

이제 음악은 프로그램 안의 파형으로, 글은 USB 폴더에 담긴 아이콘으로 익숙해졌다. 그것은 깔끔하지만 어릴 적 만들기 취향과 비교하면 따분한 풍경이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십 대 초반에 아날로그 필름 편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필름을 정말 커터로 잘라 테이프로 이어 붙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수작업으로 영상이 만들어진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예전의 영화는 만드는 이에게 2기가 분량의 동영상과는 다른 것이었으리라.

아날로그 감성까지 구현하는 시대다 보니 '손맛'이라는 것도 애물단지가 된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많은 작업을 '오려 붙이기의 언어'로 상상해 보며 의욕을 얻는다.

 

아무것도 완성해본 적 없던 지망생 시절, 반성의 일기를 썼다. 그때까지 가졌던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과 단절의 일기였다.
당시 내계 영향을 준 사람들은 서로가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돕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걸 중요시했다. 그들과 대화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평가나 판단을 하지 않아 편안했다. 사실 그전까지 내 언어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전문가 집단에 재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멋진 표현에 골몰했다.
나는 한동안 꿈을 접고 다양한 삶의 풍경을 접했다. 우리는 목적 없이 몰려다녔고 게시판에 서로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했다. 형식은 자유였다. 일기도 되고 그림이나 시도 상관없었다. 주로 비평이나 논리적 글을 쓰던 나는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드로잉 같은 것도 그려 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기발한 아이디어의 매력이 다시 찾아왔다. 유행하는 문화에 호기심이 생겼고, 진솔함도 좋지만 짓궂고 세련된 유머도 좋았다. 우연히 음반을 만들어 판매하고 홍보하는 집단도 알게되었다.
나는 한동안 양쪽 집단을 오가며 마음이 복잡했다. 한쪽에는 근사하고 흥분되는 일을 얘기하는 이들이 있고 한쪽에는 그런 건 부질없다는 듯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두 세계 사이에서 나름의 기준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중 어느 쪽이 내 창작의 기반이 되었을까? 둘 다였다. 여전히 내게는 그 양면성- 드러내며 자랑하는 것과 감추며 무시하는 것-이 남아 있다. 양쪽이 뒤어나올 때마다 내 일부려니 받아들인다.

어떤 일에 순수한 홍미가 생겨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애기했는데 다들 수익성이나 그 일의 고된 면에 대해서만 애기한다면? 맥이 빠질 것이다. 아쉽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일이 그렇다. 먹고사는 일이 만만치 않은 데다 순수한 흥미로만 뭘 할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이십 대의 나는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리스너이자 아마추어 연주자로서 녹음이나 연주를 더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문제는 아마추어가 무언가를 충분히 경험할 중간 지대가 없다는 데 있었다. 선택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음악은 취미로 하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고, 음악을 일로 선택한 뒤에는 이것이 버젓한 '직업'임을 계속 증명해야 했다. 그건 피곤한 일이었다. 인디신에서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문구가 히트했을 때에도 나는 생각했다. 내가 흥미 있는 일을 알아서 하겠다는데 세상은 왜 그리 지속 가능한지를 묻는 걸까.
지금은 K팝의 성공 덕분에 '음악도 돈이 된다'는 인식이 확실히 생긴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음악이 한결 편하게 선택해 볼 만한 일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더 큰 비즈니스가 되었으니 선택의 압박도 더 커지지 않았을까?
홍미와 직업 사이의 중간 지대가 더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다. 굉장한 깊이의 아마추어 음악가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흥미만으로도 음악을 오래, 천천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처음으로 돌아가 음악이라는 일을 더 편안하게 선택해 보고 싶다.

나는 글과 음악, 번역 등에 다양하게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핵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년기부터 가져온 내 관심의 원형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가령 나는 내가 인디신에서 음악가로 활동하며 간간이 책을 쓰고 마감을 지켜 가며 살지 몰랐다. 이 일들은 내가 변화하는 환경을 예상하고 택한 것이 아니었다. '만들기'라는 원형을 품은 채 내 시대의 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 것일지 모른다.


'창작하는 일에 대한 동경'을 깰까 봐 잘 애기하지 않지만, 솔직히 창작하는 일이 마냥 재미있거나 신나지는 않다. 지금 해야 하는 몇 가지 작업을 떠올려 본다. 그 일이 즐거운가? 그렇지만은 않다.
이유는 긴장 때문이다. 창작이 일인 이상 아무 때나 맘 내킬 때 할수는 없다. 대부분 마감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잘해야 한다. 협업자와의 악속도 지켜야 한다. 결과물에 대한 평가와 자존심, 작업자로서의 윤리도 읽혀 있다.
나는 평소 미미한 전류처럼 흐르는 긴장의 본질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잘해 나가고 있음에도 마음 한편으로 제대로 못하면 어쩌나 하는 가정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기한 내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그런 경우는 잘 없는데도.
불안해할 시간에 조금씩 해 나가는 게 낫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마음은 그러지 못한다. 수시로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순조로워도 모자랄 작업에 브레이크를 건다.
요즘 들어 창작 환경을 즐겁게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모든 게 마냥 즐거울 순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재미있고 보람된 일로 기억되는 게 좋지 않을까. '잘 버텼다'  '많이 했다'는 바라지 않는다. 일의 수고로움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어차피 세상은 바쁘고 모든 작품을 의도대로 들여다봐 줄 여유도 없다. 보람보다 회의가 드는 일이 많은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상이 몰라주더라도 스스로 해볼 만하고 재밌었다는 기억을 꾸준히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바짝 다가온 일정과 꾸역꾸역 해 나가야 하는 일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과정을 즐접게 만들어 보려고 애쓴다. '이렇게 작업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라는 마음으로.

음악가 이랑은 '잘 들고 있나요'라는 곡에서 자신의 노래를 '질문밖에는 없는 이 노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질문은 대단한 것이다. 질문 하나로 많은 생각이 땅속에서 끝려 나오기 매문이다
나는 첫 앨범에 '음악가, 음악가란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내레이션을 넣었다. 질문에 대한 명화한 답은 몰랐다. 그저 직업이 음악가인 내가 '이 이상한 직업은 도대체 뭐지?'라는 물음을 자유롭게 던져 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대답이 끌려 나왔다. 무의식 속에서, 침묵 속에서. 3분 정도의 질문과 대답으로 이 트랙을 마무리했지만, 사실 더 길게 이어 나갈 수도 있었다.
질문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바로 듣는 이의 머리와 마음을 음직이는 것이다. 듣는 이에는 자신도 포함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잘 던지면 안 나던 생각도 나기 시작한다.
나는 노래를 쓰는 일이 막막할 때 스스로에게 문는다. '무슨 노래가 듣고 싶지?' 이렇게도 묻는다. '어떤 노래가 필요하다 생각하지?' 글 쓰는 일이 막연할 때도 묻는다. '지금 네가 쓸 수 있는 게 무엇이지?' 이런 질문이 추상적인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 준다.
창작이 하나의 발견이라면 무작정 여기저기 파 보기보다 먼저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일단 좋은 질문을 던지면 파는 곳마다 연관된 게 끌려 나오기 때문이다. 꼭 기발하거나 독특한 질문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작동하게 하는 촉매제면 된다. 작은 스파크같은 것.


내가 제일 잘 연주할 수 있을 때는 한 달 동안 피아노를 접하지 않을 때입니다. - 글렌 굴드 
(출처: 브뤼노 몽생종, 임동현 옮김 '글렌 굴드,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모노폴리, 2008)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게 그거죠. 한 번에 몇 개의 삶을 살면서 포기하지도, 그중 어느 것도 버리지 않는 거요. - 아녜스 바르다
(출처: 메이슨 커리, 이미정 옮김, '예술하는 습관', 걷는나무, 2020)

 

- 김목인, 영감의 말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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