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음식
공장식 육류 생산방식에서 소비하는 물의 양은 전체 농림축산업에서 소비하는 양의 3분의 1에 달하고, 배출하는 온실가스량은 전 세계 배출량의 약 14.5퍼센트를 차지한다. 여기에 축구장 크기에 맞먹는 유독성 슬러리slurry(동물 배설물에 점토, 분탄, 시멘트 따위가 섞인 걸쭉한 물질-옮긴이)와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을 더하면 숨은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이런 피해에 따른 부정적 경제가치를 정확히 추정하기 ㅇ렵지만 인도과학환경센터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요인을 고려할 때 공장식 버거 하나의 진정한 원가는 평소 우리가 지불하는 2달러가 아니라 약 200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먹는 조류나 짐승이 누리는 삶의 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고기에 얼마나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다.
자신이 먹는 동물이 행복하게 살았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아직 놓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2018년에 전 세계 식탁에 오른 가축 700억 마리 중 3분의 2가 공장식 가축 농장에서 일생을 보냈고 미국만 따졌을 때 수치를 99퍼센트까지 치솟는다. 이 충격적인 규모를 대강이나마 짐작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 중 60퍼센트가 가축이고 36퍼센트가 인간이며 나머지(단 4퍼센트)가 야생동물이다. 앞서 이야기한 수치로 알 수 있듯 인간의 육식 습성이 우리 자신과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 이후 식물성 대체 달걀 비욘드 에그, 저스트 에그 이야기.
초고속 기술과 폭발적 이익, 무자비한 경쟁, 넘치는 테스토스테론을 주입받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CEO들에게서 발현한 실리콘밸리의 문화는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장악했다. 이들 거대 기술 기업이 워낙 막강한 데다 이제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보니 누구든 기업의 실제 나이를 들으면 적잖이 충격을 받고 만다. 실험식 식품이 획기적으로 성장한 2013년에 구글을 이제 막 15년이 되었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1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파릇한 젊음이 의아할 정도로 이들 기업은 우리의 쇼핑과 의사소통, 개인 정보는 물론 미래의 생활 방식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2018년에 수익 1,000억 달러를 넘긴 구글은 산하 연구기관인 구글 AI를 신설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얼굴 인식부터 무인 자동차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디지털 생활의 설계와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실리콘밸리가 왜 음식에 흥미를 보였는지가 아니라 왜 이제야 흥미를 보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인류의 삶이 이렇게 복잡한 적은 없었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 인류가 이렇게까지 기술에 의지한 적도 없었다. 지구는 곤경에 빠져있고 그 안에서 몇 안 되는 다국적 기업이 우리가 소통하고 여행하고 정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식생활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중략)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시급히 되돌아보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제안하듯 음식을 렌즈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음식과 기술은 인류 진화의 양대 기둥이다. 우리는 지금의 곤경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두 기둥을 활용할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핵심에는 모든 생명체의 근본 질문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가 있다. (중략) 이성이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먹는 방법에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음을 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해 의견이 갈릴 수도 있지만(실제로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전쟁이 벌어졌다) 우리에게 먹는 것은 불가피하게 윤리적인 문제다.
FAO에서 2005년에 예측한 바, 전 세계 육류 및 유제품 소비량이 2050년이면 두 배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에 부합하려는 듯 소비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식생활의 변화는 중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1980년대에는 중국인의 80퍼센트가 지방에 거주했지만 이제는 53퍼센트가 도시에 거주하고 2025년이면 70퍼센트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1982년에 중국인 한 명의 1년 평균 육류 소비량은 13킬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60킬로그램에 이르며 이 역시 계속 증거하고 있다. 이마저도 미국인의 육류 소비량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지만 인구 전체로 놓고 보면 현재 중국인이 전 세계 육류의 4분의 1을 섭취하고, 버거를 사랑해 마지않는 미국인보다 두 배 더 많이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음식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한 가지 답은 진실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삶을 지속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 채 속 편히 사는 것이 한때는 부자의 특권이었지만 값싼 간편식 덕분에 이제는 누구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런 태평함이 산업화의 최대 업적 아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깊은 도덕적 불안의 징후일 수도 있다. ‘호스게이트’(유럽 등지에서 판매된 저렴한 고기 파이에 불법 말고기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진 사건-옮긴이) 같은 추문 하나에도 우리는 미식이라는 수면 상태에서 불현 듯 깨어난다. 이 추문이 드러난 직후 사람들이 저렴한 파이를 거부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 나서면서 여국 내 개인 정육점의 판매량이 30퍼센트 상승했다. 하지만 개인 정육점 부흥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파이 판매량은 몇 달 안에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갔고 위기는 전형적인 영국식 유머 속에 흔적으로만 남았다, 웨이터: “버거에 따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고객: ‘네. 양쪽에 5파운드씩 걸게요.“
첫째, 배양 소고기는 소태아혈청에서 자라기 때문에 실물성 헴haem과 달리 여전히 동물을 사용한다. 물론 일반 소고기에 비하면 사용 규모는 훨씬 작다. 둘째, 배양 소고기에는 거북한 성분이 포함된다. 실험실에서 자란 식용 근육조직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소유권 문제다. 구글의 비공식 슬로건이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현재는 ‘옳은 일을 하자’로 바뀌었다)라고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고 공유하는 방식까지 통제하는 다국적 기업에 우리가 먹는 음식의 제작과 소유권까지 맡기고 싶은가?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다른 어떤 기업이 시험관 소고기 제작 기술을 소유하리라 생각하는가? 당연히 동네의 친절한 농부나 정육점 주인은 아닐 것이다. 실험실 고기가 성공한다면(지금 모든 징후가 성공을 예견하고 있다) 관련된 이들은 분명 특허 등록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고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처럼 눈이 돌아갈 만한 이익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단순히 채소를 더 많이 먹는 것보다 실험실에서 근육조직을 배양하는 것이 더 좋은 생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인간이 마주한 딜레마의 본질이 잘 드러난다. 수백 년 동안 우리는 기술과 함께 진화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호모사피엔스라 일컫는 인류가 되었다. 기술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도 생존하지도 못했을 테지만 지금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를 갑자기 멈추어선 상태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몰한 나머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기술은 더 이상 제한 요인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어떻게 먹여 살릴지, 냉난방은 어떻게 하고 질병은 어ᄄᅠᇂ게 치료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부족한 것은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능력, 서로 협력하고 공유하며 실패에서 배우는 능력이다.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투자하고 창안해야 할 분야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 사람은 제대로 생각할 수도, 제대로 사랑할 수도, 제대로 잘 수도 없다.“ - 버지니아 울프
기술이 결코 인간 대신 답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드는가’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이 사실상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의 중심에 이 질문이 있다. 언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생각하며, 걷고 말하고 휴대전화를 확인할지 결정하는 것 모두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잠이 들었을 때에도 뇌는 낮 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골몰한다. 좋은 삶을 향한 탐구는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다.
운이 좋아서 배 속이 든든하고 아늑한 집에 스마트 기기까지 풍족하게 갖춘 사람도 사랑이나 의미, 성취감, 목적 등 다른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열심히 찾을수록 손에 넣기가 더 어렵다.
유명한 연설에서 그(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며 말하기를, 평생에 걸쳐 질문한 결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며 “고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진정으로 좋은 삶을 누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수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에 가담해 다른 무엇보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노동자를 탄압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바다를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차를 운전하고 휴일에 비행기를 타고 스테이크를 먹고 스마트폰을 쓴다면 하늘에게 빌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막연하게나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생의 다양한 딜레마에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지식과 노력이 필요한데, 무수한 사람과 생명체, 구조와 조직 등 존재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대상에 우리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심하게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소크라테스와 붓다 모두 인문주의 사상의 창시자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뭇 진지하게 들리는 이런 개념과 필연적으로 대응 관계에 있는 것이 인문주의의 또 다른 큰 줄기인(그러면서 인생의 우여곡절에 맞서는 최선의 방어책으로 남아 있는) 유머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역설에 시달린다. 기술적 역량은 압도적이지만 양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무인 우주탐사선을 혜성에 착륙시키고 로봇이 스시를 서빙하게 하는 등의 기술로 이를테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거나 신의 존재에 대한 의견 차이를 인정하거나 어류와 공존하는 등의 비기술적 난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인간은 ‘하드’ 기술을 개발하면서 ‘소프트’ 기술을 희생시켰고, 은유적 표현을 빌리자면 기술이라는 꼬리가 철학이라는 개를 뒤흔들도록 용납했다.
이런 디지털 삶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화면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결과 사회적 행동과 생각하는 방식까지 이미 바뀌었다. 디지털 삶이 선사하던 아찔한 스릴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자 사이버 범죄나 자해 조장 사이트, 악플, 정치 선전, 사생활 감시, 데이터 마이닝(대용량 데이터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는 것-옮긴이) 등 어두운 측면이 사방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소통의 지평선을 넓히자 자유가 일부 침해되었다. 자료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고양이가 쓰레기통 뚜껑으로 야단스레 노는 영상에 빠져 지내면서 우리는 고도로 조작되고 상품화된 지뢰밭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감시당하고 저장되며 이익을 위해 팔아 넘겨졌다. 그렇게 개인 맞춤형 디지털 세상에 고립되어 알고리즘이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라 일컬은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친숙한 음식은 향수라는 강렬한 감각을 일깨운다. 영국의 요리사이자 음식 전문 작가 나이젤 슬레이터가 자서전 <토스트>에서 말했듯 그 음식 자체가 그리 맛있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식에 사랑이 담겼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 케이크가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준다고 믿었다. 어머니가 식탁 위에 케이크를 올려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다 괜찮다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안전하고 무사하고 굳건했다.”
먹는 것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오래 지속되는 기쁨이다. (중략) 음식은 삶의 본질이자 삶의 깊은 은유다.
현대사회에서 음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일은 좀처럼 없다. 산업화는 우리가 먹는 음식의 근원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음식이 진정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본성에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심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확한 인식이 있었기에 찰스 다윈이 위대한 발견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종의 다양성을 설명하고자 분투하던 다윈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란 곧 특정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만이 살아남아 번식할 수 있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적자생존’이 종의 분화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해 여러 종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에서 비롯된 미식가epicure라는 말은 식도락가와 동의어처럼 사용되면서 고상한 취향과 지식, 두둑한 지갑 덕분에 최고급 요리를 음미하는 이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에피쿠로스는 드물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을 탐하기보다 매일 마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이야기했다.
일각에서는 에피쿠로스의 물러남을 두고 순진하다거나 이기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지만, 개인의 덕에 초점을 맞춘 그의 사상은 개인적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정체성의 정치가 장악하는 지금 이 시대에 직접적인 울림을 준다.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했듯 개인의 번영과 공공의 번영을 구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잘못되었다. 사회적 또는 개인적 차원에서 일생일대의 딜레마에 빠졌든 아니든, 단 하나의 진정한 답은 개인과 사회의 균형이어야 한다.
<2장> 몸
네 명 중 한 명은 초미각자로, 역시 넷 중 하나에 속하는 미맹보다 미뢰가 16배 더 많다고 한다. 초미각자는 다른 사람보다 맛을 잘 구별해내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방울양배추 등에서 맛볼 수 있는 쓴맛에서 고통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초미각 유전자가 반드시 유전되는 것은 아닌 까닭에 이런 미각의 차이가 가족의 식사 시간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부모의 미뢰를 물려받지 않아도 식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가령 임신한 여성이 카레를 유난히 좋아하면 카레의 알싸한 마늘 맛과 매운맛 등이 양수를 통해 태아에게 전해져서 태아는 이후 매운 음식을 선호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식성은 대부분 태어난 후에 획득하는데 (중략) 특정 음식이 좋고 싫은 문제에서는 익숙함이 전부다.
채소를 ‘다 먹으면’ 말썽을 피워도 된다는 식으로 아이를 꾀면 이후 아이의 미각이 평생 틀어질 수 있다. ‘즐거움과 건강을 적대시하도록’ 가르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후세포가 4,000만 개씩 있는데, 개보다 50배 적은 양이지만 이 정도면 수조 가지 다른 냄새를 충분히 분간할 수 있다. 이 냄새 보관함의 폭발적인 탑재량을 보면 맛을 감지하는 기능이 우리 몸에서 가장 복잡하지만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뇌피질(뇌에서 인간적인 부위)은 고대 파충류의 두뇌와 후신경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맥기가 언급했듯 “냄새에서 마음이 비롯되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초콜릿 도넛을 먹을 때 뇌에서 반짝이는 모든 부위 중에서 이 다음 도넛을 먹는 것이 좋은지 묻는 것은 전전두엽 피질뿐이다. 간단히 말해 유혹과 싸우는 유일한 뇌 부위가 전전두엽 피질이다.
헝가리계 미국인 경제학자인 티보르 스키토프스키Tibor Scitovsky가 1976년에 저서 <기쁨 없는 경제>에서 지적했듯 전통 사회와 소비주의 사회의 큰 차이점 하나는 즐거움을 도모하는 방식에 있다. 전통 문화에서는 전후 맥락과 관련지어 즐거움의 범위를 결정한다면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즐거움을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후자와 같은 접근법은 파충류의 뇌가 관심을 보이겠지만 신체의 동기 부여 체계를 방해해 즐거움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스키토프스키는 말했다.
<3장> 집
핀란드어에 시수sisu라는 단어가 있다. 역경을 마주한 사람의 강인함과 투지, 집념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자질이 있어야 1년의 절반이 춥고 어두우며 이웃 마을과 30킬로미터씩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할 것이다. 이런 불굴의 의지는 잘 알려졌다시피 몇 시간씩 침묵을 이어갈 수 있는 핀란드인의 능력과 분명 관련이 있다. 사람과 지형은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나고 자란 곳에 따라 형성된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의 중요성은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벗이라는 뜻의 companion에는 빵을 함께 쪼개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함께라는 뜻의 라틴어 com과 빵이라는 뜻의 panes가 결합했다)는 물론이고 단체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미국 신경과학자 폴 J. 잭이 발견한 바, 식사를 함께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 이는 모유 수유나 다른 형태의 감정적 유대와 관련된 호르몬이다. (중략) 잭이 ‘도덕적 분자’라 이름 붙인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우리는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황금률을 따르게 된다. 바꾸어 말해 큰 파이 한 조각을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고 물러서면 남도 그럴 것이고, 결국 모두 두 번째 조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홍콩에서는 일요일마다 필리핀인 가정부 수천 명이 센트럴이라고 알려진 중심 업무 지구에 모여 홍콩 상하이 은행 같은 예상 밖의 장소를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번쩍거리는 기업의 외양 아래에서 그들은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매콤한 음식이 담긴 도시락 통을 펼쳐놓은 채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구에게 온 편지를 읽고 고향에서처럼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 출신 지역이 다르면 모이는 장소도 달라진다. 그렇게 필리핀의 맛 지도로 바뀐 센트럴에 풍기는 낯선 냄새에 이웃들이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필리핀 가정부들은 그 냄새로 일주일 중 어느 때보다 더 집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아테네에서 공적 생활은 모두 남성의 몫이었고 여성과 아이들, 노예들의 사적 영역은 이디온idion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바보idiot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1800년 이전에 ‘가족’은 어쩌다 한 지붕 밑에 함께 살면서 일하게 된 사람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가정은 휴식하는 곳이라기보다 도시 및 시골 경제의 주축이었고, 가정의 주된 기능은 편안함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엄격히 높이는 것이었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집은 안락함과 거리가 멀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에서 2018년에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지며 주기적으로 혼자 식사하는 생활은 불행과 강력히 연관되어 정신질환을 제외한 다른 어떤 요소보다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는 교류도 중요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매슬로가 파악했듯 개인적 성취도 중요하다. 타블로 스키토프스키가 주시한 것처럼 지금의 소비주의 문화는 개인적 성취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물질적 위안에서 얻는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 탓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향한 사랑은 필수이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먹기와 사교 생활 다음으로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기쁨인 기쁨을 만드는 기쁨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소비주의의 부단한 압박을 받은 끝에 우리는 아직 잘 돌아가는 오래된 물건을 새로운 물건으로 대체하는 삶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쓰다 버리는 문화는 지구만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위협한다. 크로포드가 주목한 것처럼 물건을 고치는 데 필요한 창조성에는 고도로 정교한 인지적 노력이 수반되며 특별한 보상도 따른다 .인간의 뇌가 이런 수작업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 않다. 결국 우리는 350만 년 동안 도구와 함께 진화한 존재가 아닌가. (중략) 손을 쓰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선천적인 활동이다. 크로포트가 지적했듯 두 기능은 의식에서 서로 나눌 수 없는 절반씩을 형성한다.
수렵 채집인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반면 현대인은 생존하려면 무수한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4장> 사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단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책 <정치학>에서 평소답지 않게 논점을 흐린 대목에서 태어날 때부터 통치를 받아야 할 운명으로 ‘천성이 노예’인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역설적인 점은 저임금 이주민 노동자가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그들이 한때 노예가 맡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에 적합한 사회를(다시 말해 착취가 아닌 협력이 바탕이 되는 사회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공유를 위해 더 나은 구조를 고안해야 할 것이다.
대금업자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나무 의자banci에서 이름을 딴 은행업banking이 생겨난 것이다.
‘낙수 효과’ 이론(부가 늘어날수록 좋은 이유는 다른 경제가 닿지 않는 사회 곳곳으로 부가 흘러들기 때문이라는 견해)은 자본주의의 중심 교리다. 그 이면에 소비 지상주의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더 많은 제품을 사들이지 않으면 공장 주인도 사업을 더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스미스는 삶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탐하는 인간의 욕구가 끝이 없음을 알아보았다. “인간의 위장이 작은 탓에 누가 되었든 음식을 탐하는 욕구는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건물이나 의상, 마차, 가구 등 편이ㅡ용품이나 장식품을 탐하는 욕구는 한계도 없고 경계도 없다.”
1890년에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람ㄷ르이 상품에 얼마나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부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산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경제에 대한 소위 신고전주의적인 이런 접근이 부를 측정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단순히 사람들이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계산해 그 총액을 국내총생산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GDP가 실제 제조 비용을 무시하고 가령 교량 건축에 든 비용과 범죄 발생 후 처리 비용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 경제활동은 무엇이 되었든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2017년에 발표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에서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사람들이 주당 최대 15시간씩만 일하고 기계화된 노예, 즉 로봇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공유 이익을 보편적 기본 소득의 형태로 나누어 가지는 새로운 여가의 시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자본주의가 줄곧 추구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난 세대의 피와 땀, 눈물’의 결과인 부를 공유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을 근절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해졌다는 것이다.
여가를 무한히 즐기는 삶을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일부 은퇴자들이 이미 그러고 있듯 아무 목적 없는 무감각 상태에 빠지고 말까? 새로울 것도 없는 질문이다. 이미 1930년에 다름 아닌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가 진보하면 필연적으로 주당 노동시간이 단축될 테고 사람들은 끝이 없는 여가 생활을 감당하는 데 애를 먹으리라 내다본 케인스는 이것이 미래 세대에게 닥칠 최대의 시련이라고 보았다. 케인스는 의미 있는 일이 좋은 삶에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사람들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할 수 있도록 여가 사회로의 전환이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바는 위기가 닥쳤을 때 인류가 훨씬 더 잘 협력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 세기에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된 역사상 가장 선구적인 사회 프로그램(뉴딜 정책과 사회복지 제도)이 각각 월스트리트 폭락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의 고난을 겪을 때 인류는 자연스럽게 힘을 합쳐서 서로 더욱 공감하고 남을 위하며 통찰력을 발휘한다. 위기를 겪으면서 일상의 귀중함을 깨닫고 잠깐이라도 이미 누리고 있던 것에 감사한다. 한마디로 위기 앞에서 우리는 가치를 재조정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 점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방향을 바꾸지 못한 것이 이번 세기에 인류가 놓친 최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지역 자원을 보호하고 고대 전통을 유지하며 세계화에 맞서 싸우기 위해, 혹은 단순히 더 잘 먹고 자연과 더 많이 교류하고자하는 욕구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유기농 꾸러미, 지역사회 공동 부엌 및 정원, 소규모 양조장 및 빵집, 식품 협동조합 및 공동체지원농업CSA 프로젝트 등의 형태로 시행되고 있다. 이를 통해 도시 거주자는 자신의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 농부에게 미리 돈을 지불하고 심지어 농장 일을 도우러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소장국 및 영세 농부를 위한 협동조합과 지역사회 요리 및 재배 모임, 자신의 땅과 물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세 생산업자와 토착민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현실적 특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짊어진 도덕적 의무는 음식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문 앞에 도착하기를 기대하는 단순한 소비자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스스로 먹고 사는 일에 적극 참여해 최소한 무엇이 필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새벽 네 시에 감자를 캐거나 우유를 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동체지원농업이나 지역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지원하거나 지역 농산물 꾸러미를 구독해 생산자라는 뿌리와 소비자라는 가지를 직접 연결하라는 뜻이다. 본질적으로 좋은 음식을 정성스레 생산하는 이들에게 관심과 감사를 표하고 힘들게 번 돈을 그들에게 쓰라는 뜻이다.
좋은 시토피아는 자연스럽게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사회다. 음식은 모두 자연에서 얻으며 모범적인 농업은 자연의 생태 순환을 보살피고 흉내내기 때문이다. 음식 중심 경제는 오이코노미아를 다시 경제에 적용해 자연적으로 사회의 회복력을 높이는 근간이 된다. 현지 생산이 늘어나는 쌍방향 사회가 되면 우리는 더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누릴 것이다. 지역 농장과 정원이 늘어나면 초목이 우거진 더욱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되어 건강과 행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로 속을 태울 일은 줄어들고 더 공정한 세상에 살면서 행복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시대가 서서히 무너뜨린 삶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것이다. (**시토피아: 그리스어 '음식(sitos)'과 '장소(topos)'의 합성어)
<5장> 도시와 시골
큰 돈벌이가 될 만한 사업이라면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는 구글조차 수직 곡물 농업 프로젝트인 알파벳 X를 포기했다. 실내에서 곡물을 효과적으로(즉, 수익성 있게) 재배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국인이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자연 배후지를 파괴한 것처럼 브라질인도 녹지를 파괴하고 있으며 거대 농기업 카르텔로 인해 미국은 여전히 이익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2017년에 브라질 세라도(브라질 면적의 5분의 1에 달하는 숲이 우거진 대초원)에 퍼진 산불은 버거킹의 주요 공급 업체인 카길과 번지의 대두 생산과 연관된 것으로 밝혀졌다.
서사는 언제나 강한 자의 것이다. 2012년에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곳The Fastest Chaging Place on Earth)이 매력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6년에 걸쳐 촬영된 이 다큐멘터리는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1,600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산골 지역인 백마촌이 인구 20만 명을 거느린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저속 촬영 기법을 활용해 고대 건물과 좁은 진창길, 아름다운 주변 환경이 있던 마을이 사라지고 중앙 광장 주변으로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 정당 당사가 늘어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곳이 그랬듯 발전으로 향하는 중국의 행진에는 들판에서 힘겹게 일하는 고된 삶이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는 고된 삶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포함된다. 외딴 곳이지만 유대감이 강한 공동체를 기숙사 지역의 고립된 아파트와 맞바꾸는 것이다. 전자의 삶이 후자의 삶보다 ‘인간답지 못한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 온 뒤 흙의 냄새를 알고 새와 나무의 이름을 아는 것은 평면 TV나 나이키 운동복을 소유하는 것과 전혀 다른 ‘재산’이기 때문에 평가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가장 깊이 표현하는 환대에 호소하면서 프루동은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재산 소유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조지가 알아낸 바, 진보가 이행될 때마다 빈곤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진보로 창출된 부가 결국 노동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토지의 가치를 높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모든 땅을 공동소유화하고 개별 토지 소유자에게 사용 특권을 누리는 대가를 청구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아이디어와 함께 조지는 악화하는 불평등을 단번에 해결할 방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토지 기반 재산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 회복력 있는 문화를 이끈다는 주장에 근거가 필요하다면 바로 이런 곳이 바로 증거다.
이와 관련된 전통 중 하나가 러시아의 다차dacha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부지에 소박한 목조 주택이 딸려 있는 다차는 도시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여름철이나 주말에 찾아와 채소를 가꾸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이 전통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충성스러운 가신들에게 나라에 충성한 노고를 치하하고 그들을 계속 곁에 두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국유 토지를 하사하면서(다차는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시작되었다. 평범한 다차는 귀족 저택과 거리가 멀지만 여름이면 주기적으로 도시를 떠나 다차로 향하는 관습이 러시아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강탈이 자행되던 소련 시기에 식량을 직접 재배하던 것과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현재 약 6,00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전체 인구의 40퍼센트에 달한다) 다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말이 되면 모스카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를 빠져나가는 차량들로 교통 체증이 끔찍한 수준에 이른다. 특히 노동절 연휴에는 수백만 명이 한 해의 농작물을 심기 위해 도시를 떠나면서 연례행사처럼 인구 대이동이 펼쳐진다. 러시아에 음식이 부족할 일은 더 이상 없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주말이면 가족을 위해 땅을 가꾸고 과일과 채소를 기르며 겨우내 즐길 피클과 잼을 만든다.
다차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삶에 시간적 공간적 질서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예다. 여러 면에서 부유한 로마인들이 즐긴 오티움과 네고티움의 리듬이 여기서도 이어진다. 음식을 소중히 여기면 자연에 더 가까워지고 하루 24시간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후기 산업사회에서 음식을 다시 소중하게 여긴다면 무엇보다 시골이 부흥해 눈에 띄는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시골에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현금이 흐르면서 우체국이나 학교, 병원, 상점 및 운송 같은 서비스업이 급증할 것이고 이에 따라 시장이나 물류 창고, 식품 유통 중심지 및 도살장과 같은 배급망도 더욱 발전할 것이다. 풍경 역시 바뀌어서 다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규모 유기농 농장이 되살아날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언제나 그랬듯 식품을 중심으로 자라날 것이다.
<6장> 자연
현재 인류가 지구에 가하는 가장 치명적인 행동은 사냥이 아니라 농사다. 인류가 다른 종을 희생시킨 채 특정 동식물을 선택적으로 사육하고 재배하면서 지구 내 야생종의 분포 범위의 다양성이 대폭 감소했고 이제 인류가 사육하지 않는 종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다. 생태학자들은 인류가 공룡의 멸종처럼 치명적일 수 있는 여섯 번째 대량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한다. 2017년에 미국 생물학자 폴 R. 에얼릭을 포함한 연구진이 발견한 결과, 개체 수가 감소한 척추동물종이 전체의 3분의 1에 달했다. 1900년 이후 연구된 모든 개체군은 분포 범위가 30퍼센트 이상 감소했고, 개체 수가 80퍼센트 이상 감소한 종은 40퍼센트에 이르렀다. 저자들이 관찰했듯 이런 수치는 향후 멸종을 예고하는 분명한 신호다. 실제로 지난 한 세기 동안에만 척추동물 200종이 사라졌고 같은 기간의 멸종 속도는 지난 200만 년 동안의 평균 속도보다 100대? 100배? 더 빠른 실정이다. 이에 따라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냉혹했다. 우리가 “생물학적 전멸”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문명에 필수적인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서비스를 인류가 막대하게 잠식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곤충 없는 세상이 암시하는 바는 실제로도 불길하다. 곤충은 먹이사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이기도 하거니와 사실상 거의 모든 야생식물은 물론 무수한 과일 및 다른 작물의 가루받이를 책임지는 핵심 매개체다. 곤충은 동물 및 식물 물질을 분해하고 토양의 영양분을 재활용하는 등 자연의 생명주기에 필수적인 존재다. 곤충학자 에드워드 O. 윌슨은 곤충 없이 인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몇 달 뿐이라고 내다보았다.
서양에서 육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지만(2006년에 15만 명이던 영국의 채식주의자는 2018년에 60만 명에 이르렀다) 주류 음식 문화는 여전히 육식을 고집한다. 2018년에 KFC 영국 지점에서 다름 아닌 닭고기가 바닥났을 때 고객들이 격분한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경찰에 전화를 걸었고 결국 일부 경찰 지구대에서 대중에게 단골 치킨집을 일시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경찰 관할이 아니”라고 알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왜 음식을 먹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일까? 음식이 저렴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는 임식의 진정한 의미를, 음식이 자연에서 온 살아 있는 특사임을 잊었다. 자연을 착취할 자원으로 대하면서 그 가치를 낮추어 보았다. 인간이 마주한 딜레마는 살기 위해 반드시 자연을 이용해야 하지만 그러면서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농부들은 항상 자연을 이용해왔지만 이런 개입이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규모와 일부 관련이 있기도 하고 파괴의 성질과도 관련이 있다.
자연은 복잡성을 통해 회복력을 키우지만 농업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단순화를 목표로 삼았다. 지구상에 있는 약 30만 종의 식용식물 중 17종만이 현재 인류 식량의 90퍼센트를 공급한다.
소로는 이론적으로 자신이 떠나온 문명을 비판한 루소의 의견을 되풀이했다. “사치품과 흔히 말하는 삶의 안락함은 필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의 품위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방해물이다.”
식단과 농업 방식이 인류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토지 면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페얼리(**Simon Fairlie, 'Meat: A Benign Extravagance' 저자)가 인정한 것처럼 이런 방식은 문제의 진정한 복잡성을 피상적으로만 다룰 뿐이다. 예를 들어 유기농 재배-채식 농업 접근 방식은 생태학적으로 가장 유익해 보이지만 실제로 동물이 전통적으로 수행하던 기능인 영양소 재활용이 어려울 수 있다. 반면 유기농 재배-혼합농업 방식에서는 클로버 같은 질소 고정 식물을 파종하는 것이 상당히 효율적인데, 소가 뜯어먹을 수도 있고 그에 따라 밭도 비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커지면 이런 전통적인 가축 사육 방식에 내재한 이점 역시 커진다고 페얼리는 말한다. 예를 들어 돼지에게 음식 찌꺼기를 먹이면(오래된 관습이지만 유럽에서는 2001년에 구제역 위기를 겪은 뒤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만 연간 80만 톤의 돼지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데 이는 영국인의 총 육류 소비량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페얼리는 동물석 식품이 채소나 곡물보다 평균 1.2배 더 영양가가 높으므로 식물 기반 접근법의 일환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열렬한 육식주의자들이 황급히 달려가 바비큐 불을 지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연구 결과가 스테이크를 실컷 먹어도 되는 구실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페얼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 어디에도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없다.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기는 사치다." 그래도 '기본 가축default livestock'이라 부르는 방식이 설득력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기본 가축이라 함은 '채소에 지속 가능한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농업 시스템에 없어서는 안 될 부산물'로서 가축을 사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그랬듯 동물을 사육하면서 풀과 음식 찌꺼기, 수확 잔여물 등 안 그러면 바로 쓰레기가 되는 영양분을 먹일 수 있다는 뜻이다. (중략) 페얼리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기본 가축' 사육 방식을 전 세계적으로 시행할 경우 인류가 현재 소비하는 육류 및 유제품의 절반가량을 공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인당 연간 고기 18킬로그램(주당 350그램)과 우유 39킬로그램(주당 우유 0.7리터 또는 치즈 75그램)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 엄청난 양은 아니지만 곡물 및 채소 재배로 발생하는 잉여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료라고 페얼리는 말한다.
<7장>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