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계: 불신에 시대에 타인을 초대하기

 

-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사랑하고 싶을 때 내가 궁금한 건 그가 어제 어떤 음악을 들었으며, 지난 주말 어떤 책을 읽었고, 먼 훗날 어디로 여행을 떠나길 원하는지일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디테일을 알고 싶을 따름이다. MBTI가 필요하다면, 그런 디테일에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의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다.

 

- 바라는 건 그저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 문해력 또는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타인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 뇌가 그럴 '용기'를 학습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적으로 계속 자기 이해, 자기 입장에 익숙한 방식에만 길들여져서 그에 갇혀버리는 폐쇄성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문해력을 이야기할 때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에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의 범람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해력이 가장 필요한 지점도 사실은 이분법 가운데 제3지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적과 아군의 구별은 단세포생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등동물일수록 이해에 기반을 둔 타협, 화해, 제3의 길로 나아갈 여지가 늘어난다.

 

-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환상이나 이상을 만들어 왔지만 이 시대의 편견은 더 교묘하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계급화하는 듯하다.

 

- 청년 세대의 비혼과 저출생 등과 관련하여 이보다 더 핵심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점점 더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주춧돌'이 아닌 건물 꼭대기에 올리는 '머릿돌'로 보고 있다. 이들에게 결혼은 어른과 부모가 되기 위한 기반이 아니라 모든 준비가 갖춰진 이후 해야 하는 일이다." 이는 미국의 프로젝트 NOT YET 연구원의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 전반의 결혼 및 출산 문화와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공동체가 와해되고 사람 사이의 단절감이 커진 시대일수록, 결혼할 상대방은 서로에게 성적인 환상과 낭만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이자 베스트 프렌드이면서 피난처인, 그야말로 '모든 것'이 된다. ... 과거처럼 누구나 때가 되면 동네의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 자체가 이 외로운 세상을 이겨낼 최후의 방주가 된 것이다.

 

- 소개팅을 할 때도 다른 것보다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혹시 어떤 것에 예민하세요?" 혹은 결혼하기 전에 '내가 가장 예민한 것 리스트'를 일주일간 심사숙고해서 10개 정도 적어서 서로 교환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삶의 만족이나 안착도 자기의 예민함을 잘 충족시켜주는 데 있는 셈이다.

 

- 무엇이 되었든 믿음의 대상이 바로 제3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지점에 있다. 딜레마를 해결하는 연습은 달리 말해 믿음의 연습인 것이다.

 

 

2. 지도 없는 시대: 삶의 구경꾼이 되지 않는 법

 

- 결국 우리 문화에서 전시되고 거론되는 삶이란 두 가지밖에 없게 된다. 내가 깔고 앉은 불행의 삶과, 내가 선망하고 질투하는 완벽한 삶 말이다. 

 

- "부러움은 갖고 싶지만 지금 나에게 없는 것과 관련 있는 반면, 질투는 갖고 있지만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과 관련 있다." 이는 심리치료사인 에스터 페렐이 내린 정의다.

 

- 비난하고 싶은 삶에 존중하거나 존경할 점은 없는지, 하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하루에도 보람을 느끼거나 칭찬해줄 만한 것은 없는지 항상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독설가들의 먹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 몇 해 전 <매일경제> 칼럼에서 '시심비'라는 용어를 썼던 적이 있다. 청년 세대에게 갈수록 시간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이든 짧은 시간 안에 얻을 수 있는 만족이 중시되는 것을 시심비라고 이름 붙였다. 가령 유행하는 유튜브 영상 재생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것, 드라마 시리즈조차 짧아지는 것, 책도 얇아지고 글자 수가 적어지는 것, 그 모든 걸 시심비 중심 콘텐츠의 유행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인스타그램 등 이미지 중심의 SNS도 시간절약적 측면이 강하다. 피드 하나를 보는 데 2~3초면 충분한 구조, 사진만 찍어 올리면 10초 만에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자기 전시 같은 것들도 모두 '짧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 이 '시간'이 없다는 건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시간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물리적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게 습관화되면, 막상 여유로운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지더라도 그 시간을 '긴 시간'으로 누릴 수 없게 된다. 긴 시간의 여유 자체가 불안해서 분 단위로 나를 자극시켜주고 채워줄 것을 찾아야 한다. 시간 여유가 없는 삶 자체가 우리의 정신 구조를 바꾸고 결국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 근원에는 어렸을 적부터 시달려왔던 무한 경쟁, 인생의 모든 걸 스펙으로 평가받는 문화, 촉각을 다투며 성장하고 쉬어야 하는 '습성'이 있다.

 

- 휴식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곧 풍부한 인간성을 지켜주겠다는 뜻과도 같다.

- 앞으로 휴식권이 인격과 인권의 한 축이자 본질 중 하나로 점점 더 인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사람들을 만나면 온통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뿐이고, 그 모든 흐름을 놓치면 시대에 뒤처진 루저가 될까 봐 불안한 마음도 든다. 누구는 작년에 운 좋게 이사를 해서 1년 만에 몇억을 벌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운 좋게 주식 투자에 성공해 몇 천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 말들 속에서, 삶을 다른 측면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만 같다. 가끔은 누구를 만나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문학 이야기, 좋은 풍경이 있던 여행 이야기, 사랑이 있던 옛 추억을 말하기도 어딘지 민망하기만 하다. 혼자 뜬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서다.

 

- 모두가 과거보다 더 부자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돈을 아껴서 모은다는 개념이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평소의 소비랄 것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시할 일 없고 남들에게 보여줄 일 없는 시간은 적당한 소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이 소비 사회의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다. 일상이나 생활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덧 삶의 '기분'이나 '기쁨'에서 핵심이 된 '플렉스(flex, 소비를 통해 돈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 문화이다. 무언가를 싸게 얻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있어도 더 이상 기쁨을 주지 않는다. 가성비를 따져 싸게 얻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 특별한 공간이나 서비스의 공급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넘쳐나는 순간, 관계는 역전된다. 갈수록 이런 역전 관계가 늘어나는 것은 많은 사람이 특별한 소비적 경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이나 외제차 등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재화가 한정돼 있다. 아름다운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카페에는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것들을 원한다. 특별한 것을 소비할 때 자기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자아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는 소비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고 집 안의 무언가가 고장 나고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충분한 물질적인 대비가 되어 있다면 의외로 외부적인 충격은 견뎌낼 만한 것이 된다.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실수와 사고들에 유연하고도 관대한 마음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마음을 다잡고 아낄 건 아끼고 쓸 건 쓰면서 생활을 잘 챙겨나가다가도, 어떤 실수로 생긴 문제들이 일상을 무너뜨리고 삶을 훼손하기도 한다. 자동차를 긁어버린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거나 휴대폰을 떨어뜨린 아이를 미워하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쏟아버린 반려자를 탓하는 일이 생긴다. 돈이 무서운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안정적인 수입은 마음의 바탕, 일상의 대지가 되어준다.

 

3. 돌파와 회복: 저질러놓은 세상을 건너며

 

- 인간과 인간이 더 나은 삶을 함께 살아가고자 만든 사회라는 것은,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온 어느 인간들을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삶이라는 건 그저 살아내고 해내면 되는 것 같다. 너무 두려워하거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걸어 들어가면 되는 것, 그저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느끼곤 한다. 그렇게 걸어 들어가면, 그저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씩씩함이 아닐까 싶다. 너무 두려워 말고 그저 씩씩하게, 하루하루 일하고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 그저 어느 시절에든 시간을 아쉬워하고 삶의 가치를 붙잡고자 한다면 무언가 길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 결국 삶에서는 두 가지 질문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어떨까 싶다. 하나가 우리 시대의 강박이 되기도 한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이라면, 다른 하나는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 우리는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살기도 하지만 자기의 가치(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 살기도 한다. 삶이라는 것을 마냥 어느 감정 상태로 환원할 수는 없다.

 

- 글쓰기라는 것은 나의 모든 것에 대해 다 털어놓는 게 아니라, 내가 이야기함으로써 내 삶을 이롭게 하고 더 좋은 삶을 사는 일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온갖 욕설, 타인에 대한 뒷말, 내 안에 끓어넘치는 나쁜 감정, 내 생활의 모든 정보를 털어놓는 건 글쓰기라기보다는 배설에 가까울 것이다.나는 특히 글쓰기가 삶은 어지럽히거나 더 나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다. 적어도 내 삶에서 글쓰기란 그런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글쓰기는 내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아주 작은 힘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럴수록 내가 타인들로부터 얻는 자기효능감이라는 걸 배제한 지점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는 타인들에게 덜 민감한, 나 스스로 자족하는 자리가 얼마나 있는가, 또 그런 공간이 내 안에서 어디쯤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나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호숫가 오두막 같은 자리 하나가 내면에 지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정지우,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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