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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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도체는 외부 정보를 평가하며 주로 감정 증폭기 역할을 한다. (...) 뇌 경보 시스템은 외부 자극에 반응을 한다. 우리는 특정한 자극에 두려움을 쉽게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17년 연구에서는 생후 6개월 정도 된 어린 아기도 거미나 뱀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독성이 있는 동물은 인간 조상들에게 커다란 위험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합리적인 반응이라 볼 수 있다.

 

(...)

   우리의 경험이나 문화, 양육 환경 역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두려움도 학습의 결과인 것이다. 처음에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자극조차도, 극도로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두려움을 주는 자극으로 변할 수 있다. (...) 이것만 보더라도 감정이 얼마나 개인적인지 잘 알 수 있다.

 

(...)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아주 오래된 매커니즘이다. (...) 갑자기 수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뇌가 부스럭거리는 자극을 위험한 것으로 분류해 경고를 울리거나, 경고 시스템이 침묵을 지키거나. (...) 두려움이 없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유전자를 퍼뜨리기도 전에 간단히 잡아먹혀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는 자연에 의해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위험에 직면하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백배 낫다는 생각이 우리의 뇌리에 박힌 것이다. 그런데 덤불 속에서 위험한 동물이 튀어나오지 않는 요즘 세상에서는 진화가 우리에게 제공해준 이 선물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살짝 의심이 드는 상황에서도 우리의 뇌는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자주 두려움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 우리의 뇌는 테러를 극도로 무서운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TV에 나오는 빅맥과 누텔라 광고를 보고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실제 위험의 정도에 관계없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알 수 없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특이한 것. 테러는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반면 빅맥 세트는 이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

   케이건 교수는 전 생애 동안 두 가지의 큰 발견을 했다. 1989년에 교수는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른 수준의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년 후에 케이건 교수는 19번 아기와 같이 매우 불안도가 높은 사람도 자신의 공포를 건설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두려움에 대한 건강한 대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19번 아기는 다행히도 '헬리콥터 부모(자녀의 모든 것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는 지나친 보호 성향을 지닌 부모의 유형-옮긴이)' 밑에서 자라지는 않았다고 케이건은 회상했다. 종종 부모의 두려움은 과잉보호로 연결되며 이러한 감정은 자녀에게도 전달된다.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마, 넘어질 거야!" 헬리콥터 부모가 자녀를 솜털로 감싸는 것은 불필요한 공포 괴물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컬링 부모'다. 덴마크에서 생겨난 이 용어는 빙상 스포츠인 컬링 경기에서처럼 자녀 앞에 나타나는 상상 가능한 장애물을 모두 쓸어버리는 부모를 가리킨다.

   두려움은 너무 끔찍한 것이므로 그것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려는 태도는 두려움을 건강하게 다루는 방법을 개발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19번 아기의 경우는 달랐다.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가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케이건 교수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이는 나이와는 상관없다.

   불안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두려움은 불편한 감정이다. 이는 우리가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결코 질병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잘못 다루었을 때 생긴다. 감정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차지하는 비중이 종종 과소평가된다.

   위스콘신 대학은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2만 9천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했는지, 또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로울까 봐 두려운지를 조사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조기 사망 위험이 43퍼센트나 증가했다. 스트레스가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연관성은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도 그에 따르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없이 사는 사람과 평균 수명이 다르지 않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다루는 데 우리가 두려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매우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두려움이 우리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우리를 해칠 것이다. 반면 그런 생각을 버린다면 두려움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 만약 우리가 시험에 대한 두려움을 무서워하기보다 하나의 자극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두려움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함으로써 움츠러들게 하지만 동시에 예민하게 하기도 한다. 두려움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우리가 집중하도록 해준다. 무대 위에서 두려움이 너무 커 하려던 말을 제대로 못 할 수도 있지만, 무대 공포 없이는 에너지와 추진력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두려움 없이는 자신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실행력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두려움이 진정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도전을 헤쳐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두려움을 긍정적인 자극제로 받아들여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펜실베이니아 대학 심리학과 교수 미셸 뉴먼(Michelle Newman)과 김한주 박사가 진행한 새로운 연구를 살펴보자. 걱정을 자주, 많이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2019년에 행한 휴식 훈련에서 일어난 일이다. 잠시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한 이들은 이후 급격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휴식은 이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되는 이야기다. 걱정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에 둔감해질 수 있다. 결코 완전히 쉬지 못하는, 늘 긴장으로 차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이 준비된 사람이라고 느끼며 걱정 아래에 놓인 두려움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치료 연구는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실제로 두려움을 납작하게 때려눕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고층 건물 옥상 테라스 난간으로 강제로 걸어가도록 하는 치료를 받는다. 공포는 최대치로 증가하고 생명을 지닌 유기체는 이 극단적인 상태의 진짜 공포를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불안 장애가 있든 없든 경험을 통해서 불안감은 줄어든다. 우리가 두려움을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두려움을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두려움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을 '다시 풀어놓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려면 걱정을 구체적인 두려움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이는 수년간 보훔 루르 대학에서 불안 요법을 연구해온 위르겐 마르그라프 교수의 조언이기도 하다. 노년에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을 구체화 해 은퇴 후 무일푼으로 외롭게 죽는 것을 상상해보자.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수치화된 형태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보면 두려움이 밀려들 것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을 진행시켜 진정한 두려움에 직면하면 어느 순간 두려움이 가라앉고 걱정도 줄어들게 된다. 우리의 뇌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의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들여다보면 마음챙김이 두려움을 다루는 데도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마음챙김이란 현재 일어나는 일을 평가하지 않고 의식을 집중해서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을 풀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두려움을 정직하게 느껴야 한다. 그 과정이 물론 불편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챙김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을 감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걱정, 두려움이 차례대로 머릿속에서 떠오르겠지만 이것들을 바꾸거나 무엇보다 평가하려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3분에서 5분 정도 후에 저절로 지나간다. 이때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정과의 거리가 생겨난다. 마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차가 아니라 완만한 언덕길을 달리고 있는 차를 보는 것과 같다. 거리를 두고 자신의 감정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고요하고 명료한 느낌을 준다.

  (...) 마음챙김은 신경안정제의 반대편에 서 있다. 억누르는 대신 자신의 의식으로 또렷이 느끼는 것이다. 특히 처음에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자신의 두려움을 깨닫고 결국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세계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적대시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닌 더 깊은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

   케이건 교수와 헤어지기 전 나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이제 삶의 막바지에 와 있으므로 죽기 전에 오래 고통받게 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잘 알고 이해하는 그와 같은 사람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까? "나는 내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내 갈 길을 갑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다 느긋한 태도로. 케이건 교수가 19번 아기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7. 애도

 

   (...)

   우리 사회는 애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특정한 모습을 기대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웃는 사람은 '너무 빨리' 재혼하는 사람처럼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한다. 이토록 계몽적이고 개방적이고 현대적이며, 종교의식이나 교회의 설교로부터 자유로운 우리가 애도의 형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편협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

   슬픔은 가만히 한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절망과 자신감, 울음과 웃음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그것의 앞뒤는 추의 움직임처럼 예측할 수 없다. 때로는 한 방향으로 더 나아가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끝없이 나아가기도 하며, 한쪽에 며칠씩 머물기도 한다. 유족 대부분은 단순히 슬픔의 블랙홀에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작아지다가 갑자기 큰 파도가 되어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기도 하는 예측 불가능한 슬픔의 감정을 경험한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조지 보난노George Bonanno교수는 슬픔에 잠긴 수천 명의 사람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해왔는데 보난노 교수의 분석을 지켜보면 그 무엇보다도 슬픔이 획일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애도하는 방법은 삶의 방식만큼이나 다양하다. 모두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이란 없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길이 놓여 있다. 수많은 요인이 그 방향을 결정한다. 애도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외부 환경, 문화 그리고 고인과의 관계 등등이. 고인이 길고 충만한 삶을 누리고 세상을 떠났을까, 아니면 나연이처럼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까? 고인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나? 고인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나,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하고 떠나보냈나?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는 고인과 공유한 세계가 얼마나 많았는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또 기억이 얼마나 밀접한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상실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보난노 교수의 연구는 대부분의 사람이 애도 초기에는 우울한 기분에 빠지지만 놀랄 만큼 빨리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별 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이 되어 어느 정도의 안정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혹은 유족 자신에게도 이 같은 상황은 예상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 은연중에 사별 이후에는 삶이 엄청나게 궤도를 벗어나리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35~65퍼센트가 회복의 길을 걷는다. 이것은 나름 일리가 있다. 우리 인간이 슬픔으로 인해 망가진다면 진화의 법칙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상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2019년 5월을 기준으로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에 포함된 ‘지속적인 슬픔 장애’를 앓고 있는 유족은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하다. 유족의 사회적 삶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무너지다시피 한다. 끊임없이 죽은 사람에 대한 생각만 하며 긍정적인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일종의 무감각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그 기간은 문화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는 적어도 6개월은 이어진다. 따라서 애도하는 사람의 정신적 건강이 의심되므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점을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모호하다.

 

   보다 최근의 연구는 근본적으로 고인과 관계를 끊으려는 목표를 가진 프로이트식 애도 작업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많은 유족이 죽음 이후에 고인과의 인연을 끊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딸이 세상을 떠난 후 겪었던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부모들은 죽은 아이와 관계를 유지하며 상실에 적응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를 원하지 결코 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인연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오랫동안 심리적으로 비정상적이며 슬픔에 대처하는 데 해로운 것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지속적인 결속 이론’과 같은 접근법에서는 이를 오히려 유족에게 큰 도움이 되며 정신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종종 “언젠가는 극복해야지.”와 같은 말을 하곤 한다. 그 말은 틀렸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저절로 아물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완전히 끝날수도 없고, 끝나서도 안 된다. 그 상실은 흉터처럼 남는다. 비록 치유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날 고통이 다시 밀려오기도 한다. 늘 함께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거나 지난봄에 그 사람이 씨앗을 뿌린 정원에 꽃이 피면,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리는 슬픔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우리가 깊이 빠졌던 그 슬픔은 어느새 완전한 과거의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때 일부였던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고나 질병으로 아이들을 잃었을 때 어떻게 일상의 삶이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이 변화하고 어떤 것들은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 캐나다의 음악가이자 작가인 닐 퍼트Neil Peart는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지 1년 만에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이후 슬픔의 시간에 대한 감동적인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전의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슬픔을 겪기 이전의 시간을 회상할 때 퍼트는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절대적인 제로 상태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버전의 삶을 다시 세워야 한다.”라고 그는 썼다. 더 이상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실감을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돕고 싶다면, 빈말 뒤에 숨거나 문제 해결사 역할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 잘될 거야.”나 “슬픔을 극복해야 해!” 혹은 “이 모든 경험이 의미가 있을 거야.”와 같은 위안의 말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나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기만 한다. 하지만 친구의 슬픔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주면 친구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친구가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순간에 우리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슬픔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어느 날 슬픔이 밀려올 때,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압박감에 덜 시달릴 수 있다. 슬픔은 파도와 같은 것이어서 감정을 느끼는 사이 행복이나 미래에 대한 생각, 고인과의 인연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등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슬픔'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슬픔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피할 순 없겠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불필요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몰려드는 슬픔에 해결책은 없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슬픔은 해결하거나 다루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어떤 길로 가건 지름길은 없다. 어느 쪽이든 감정이 내 발길에 따라붙게 되어 있다.

   나는 슬픔과 사랑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믿는다. 죽음 뒤의 슬픔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사랑의 대가다. 두 감정 모두 미래의 계획이나 소망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습격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사랑을 주고받았던 딱 그만큼의 흔적을 남긴다.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위로가 된다. 그 사람의 일부가 나의 미래에도 계속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실 후의 내 삶은 예전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상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감정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코르셋을 씌우지 말자. 이는 슬픔과 사랑을 비롯해 우리가 느끼는 크고 작은 모든 감정을 다루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

 

 

- 레온 빈트샤이트, <감정이라는 세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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