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시청하다가 영상을 1.5배속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2019년 8월, 미국 넷플릭스사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및 태블릿용 애플리케이션에 재생 속도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 대사 없이 흘러가는 10초간의 장면에는 '10초간의 침묵'이라는 연출 의도가 있다. 침묵에서 비롯된 어색함, 긴장감, 생각에 잠긴 배우의 표정은 모두 만든 이가 의도한 연출이다. … 누구도 좋은 음악을 빨리 감기로 듣지는 않는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아티스트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영상을 1.5배속으로 시청하거나 대화가 없고 움직임이 적은 장면을 주저 없이 10초씩 건너뛰며 시청하는 사람은 많다. 

-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 요즘에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이용하면 매달 천 엔 내외의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 영상을 볼 수 있다. 적은 비용으로 한 달에 몇십 편, 마음만 먹으면 몇백 편의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넷플릭스에서 월정액 요금으로 볼 수 있는 작품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 편 이상'이다. 여기에 지상파 TV, 기타 방송 미디어, 유튜브를 비롯한 무료 영상까지 더하면 작품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분명한 공급 과잉이다.

-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난다. 2021년 4월에 발표된 넷플릭스의 2021년도 1분기 수익 보고서에 의하면 넷플릭스의 연간 콘텐츠 제작 비용은 170억 달러 이상이다. 엔화로 환산하면 2조 엔이 넘는다(2022년 2월 환율 기준). 

- 이처럼 방대한 영상 작품을 모두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현대인은 이미 쏟아지는 미디어와 서비스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영상 미디어뿐 아니라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도 우리의 시간을 호시탐탐 노린다.

- 빨리 감기, 10초 건너뛰기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시간 가성비'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타임 퍼포먼스'라고 불린다.

-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 빨리 감기를 속독처럼 받아들인다. 속독처럼 훈련을 통해 영상 작품을 효율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가벼운 자기계발서라면 몰라도 왜 영상 작품에서까지 가성비를 추구할까? '인기 있는 작품을 보고 싶어서'라는 말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될까?

- 모리나가 씨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취미나 오락에서 쉽게 무언가를 얻거나 빠르게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멀리 돌아가는 것은 꺼린다. 방대한 시간을 들여 몇백 편, 몇천 편의 작품을 보거나 읽는 과정,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만의 관점을 얻는 과정, 결국에는 인생작을 만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 

- 그들은 "봐야 할 작품의 목록을 알려 달라"고 한다. 지름길을 찾는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 가성비가 나쁜 것을 두려워하며, 이를 '타임 퍼포먼스가 나쁘다'라고 형용한다.

- 낭비는 악이다. 가성비야말로 정의다.

- 이제는 "작품을 감상한다"보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익숙하다.

- 정의를 분명히 해두자. '감상'의 목적은 행위 자체이다. 모티브나 테마가 숭고한지, 예술성이 높은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을 접하고, 음미하고, 몰두하는 것만으로 독립적인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면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는 다른 실리적인 목적이 수반된다. '화제를 따라가기 위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작품을 보는 행위가 이에 속한다.

-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 그런 작품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사가 없는 장면은 건너뛰어도 문제없다", "자막만 따라가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 영상을 이런 식으로 시청하는 게 문제라면 책을 속독하는 것이나 해외 문학의 초역 혹은 드라마 총집편도 문제가 될까?

- 책은 출현할 때부터 독자가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로 읽을 자유가 허용되었다. 속독은 독서라는 행위의 일종이다.

- 초역과 총집편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느냐가 중요하다. 초역 작업을 한 이는 작가이거나 그와 비슷할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전문 번역가일 테고, 총집편의 편집자는 해당 드라마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연출가 중 하나이다. 본편의 감독이나 편집자가 직접 편집하는 경우도 많다. 즉 초역이나 총집편은 '전문가의 확인을 받은', '작품의 참맛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자 배려한'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니 이 역시 한 시청자의 마음대로 손쉽게 시청 속도를 바꿀 수 있는 배속 시청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 그런 의미에서 '패스트무비'는 위법성뿐 아니라 콘텐츠의 질이 담보되지 않는다(본편을 적절히 요약했는지도 의문이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빨리 감기 시청자가 그렇게 능동적인 태도로 빨리 감기를 선택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들의 동기는 대부분 '시간 단축', '효율화', '편리 추구' 등 지극히 실리적인 것이었다.

- 빨리 감기는 일본인만의 습관이 아니다. 대만에서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대학원에 유학 중인 진질문 씨(24세)에 따르면 "비슷한 또래의 대만 친구들이나 일본에서 알게 된 중국인 친구들도 빨리 감기로 영상을 본다"라고 한다. 이에 거부감이 있는 진 씨는 영상 작품을 빨리 감기로 보는 행위를 '요리를 믹서에 가는 것'에 비유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요리를 믹서에 갈아 주스로 만들어 마시는 거죠. 물론 그대로 먹는 것과 같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예술 - 감상 - 감상 모드
- 오락 - 소비 - 정보 수집 모드

- 월정액으로 영상을 감상하는 서비스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작품 하나하나의 가치가 줄었다. 
- "영화관은 작품을 볼 때마다 돈을 지불하니까 빨리 감기를 하면 아까워요. 하지만 넷플릭스에서는 월정액 요금을 내니까 크게 상관없죠."

- 월정액 자동이체로 한 달 이용권을 구입할 때는 돈을 지불한다는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니 영상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빨리 감든 건너뛰든 상관이 없어진다. 다른 일을 하면서 보거나 그냥 흘러가듯 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 OTT가 등장하기 전, 집에서 영상을 시청하려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케이블 방송만 해도 월정액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했고, 비디오나 DVD 대여의 경우 편당 수백 엔의 대여료를 내야 했다. 대여와 반납을 위해 직접 오가는 수고도 있었다. 그 정도 비용과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영상 작품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영상 작품을 많이 보는 이들은 그만큼 금전적, 시간적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있는, 즉 영상 작품에 그만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십수 년 전, 필자가 대선배였던 편집자로부터 들은 말이 떠오른다. "정말로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원고는 무료 잡지에 실으면 안 돼. 저렴한 가격이라도 제대로 값을 치르도록 해야지. 사람은 공짜로 손에 넣은 건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까."

-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시청할 때 집중도는 낮아진다. 

- 정액제 동영상 서비스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용자가 1엔이라도 싸게, 한 편이라도 많은 작품을 집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꿈이라고 여겨지던 서비스다. 하지만 이런 꿈의 서비스가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늘리기보다는 콘텐츠를 '소비'시키는 습관을 심어주는 데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도 모르겠다.

-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결과는 무엇일까? "긴박감이나 재미가 사라지는 건 당연하고, 일일이 설명해주면 보는 사람의 생각이 거기서 멈추거든요. 그러니까 이해하기에 살짝 어려운 정도로 만들어서, 조금은 시청자들이 따라오도록 해야 재미가 있어요. 각본이야 두 방향으로 다 쓸 수 있지만 어느 쪽을 택할 건지 물어보죠."

- '설명식 대사'와 '짧고 간결하게'라는 지시가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복잡한 사건을 오해 없이,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한다는 의미에서 이 둘은 동일하다.

- 이야기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시청자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다르게 말하면 대사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행간에 숨은 뜻을 읽고 사고하려는 마음이 없다.

-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시청자에게는 작품을 오독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오독의 자유도가 높을수록 작품에 깊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건 제 의견이긴 해요." (마키 씨)
- 하지만 대사로 전부 설명해주길 바라는 관객은 오독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자유를 작품의 깊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불친절하다며 불쾌감을 표현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관객이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점점 더 편한 것만 추구하죠. 세계적인 경향인 걸요. 그냥 분명하게 보여달라는 겁니다. 이해를 못하는 게 자기 탓은 아니길 바라는 거죠. 그러니 이해하지 못하면 불친절한 작품 탓으로 돌려요." (마키 씨)

-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뒤에는 시간 낭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스포일러 사이트의 줄거리를 먼저 읽는다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판단한 후에 보고 싶어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 "믿을 만한 친구가 추천하면 봐요. 확실히 재미있다는 작품만 영화관에서 보는 사람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났어요. 다들 모험을 안 해요. 그래서 되는 작품과 안 되는 작품의 양극화가 심하죠." 
- 결과적으로 일부 작품에만 관객이 집중된다. 현재 일본에서는 연간 1,000편 내외의 영화가 개봉하나 흥행하는 영화는 몇 안된다. 앞서 말한 젊은이들의 말을 빌린다면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불안"을 이때다 싶은 듯이 해소하는 것 같다.

- "밀레니얼 세대가 '체험하지 못한 것'에 가치를 둔다면 Z세대는 '체험을 따라가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앞날이나 예상하지 못한 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스포일러 소비)

- '재미없는 작품을 만나 시간 낭비하는 일'을 실패로 여기는 가치관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 첫 번쨰는 진로 교육이다. 1999년에 중앙교육심의회가 진로 교육을 제창한 이후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취업 대비 교육을 추진해왔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일하고 싶은 직업에 필요 없는 교과는 시간을 들여 배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일찍 내릴 수도 있다. 배움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5년 후, 10년 후 로드맵을 그려보라"고 가르치고, 그에 따라 학생일 때부터 이미 치밀한 플랜을 짜둔다. 느긋하게 먼 길을 돌아갈 여유가 없다. '일단 취직한 후에 내 적성이나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자'는 생각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물론 어른들은 효율을 발휘할 때와 그러지 않아도 될 때를 이해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구별이 어려워요. 10대부터 특정 과목만 중시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을 효율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죠." (모리나가 씨)

- 2020년 7월 7일에는 1976년생 탐험가 가쿠하타 유스케의 트위터가 화제가 되었다. 젊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가쿠하타 씨의 모험이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라는 질문에 절규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20대의 지방 신문 기자였음을 밝히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다들 그런 생각으로 사는지 되묻자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지, 얼마나 생산성을 낼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압박을 상당히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 꿈에서도 가성비를 찾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또 이들은 SNS로 또래와 자신을 쉽게 비교한다. SNS는 만난 적도 없는 또래의 성공을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이는 상당한 스트레스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에게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친구들은 물론이고 비슷한 나이에 무언가를 성취했거나 주목받는 인물의 소식을 언제든 접할 수 있어요. 늘 '옆을 보고 있는' 거죠. 그러니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또래들이게 뒤처졌다거나 실패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모리나가 씨)

- 라이트 노벨에서는 러브 코미디도 인기 장르 중 하나다. 왜 러브 코미디가 사랑받는 걸까? X 씨에 의하면 "주인공 커플이 반드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피엔딩이 보장되어 있고 두 사람이 꼭 이어진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러브 코미디를 선호하는 경향은 스포일러 리뷰 사이트를 읽은 후에 영화를 보는 행동과 가깝다. 불안에서 오는 '감정적 스트레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만 추구하면 당연히 그렇게 돼요. 젊은 세대일수록 마음에 여유가 없고 스트레스가 가득하니 그런 경향이 더 심하고요." 
- 이 말은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줄어들었다'라는 사실로 봐도 분명하다고 한다. 모리나가 씨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니까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장면만 보고 싶은 겁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커서' 이긴 시합의 요약 영상만 봐요. 응원하지 않는 팀이라도 좋은 플레이나 점수가 들어가는 장면은 봐요." "일본 축구는 팬의 고령화 경향을 걱정하고 우려합니다. 스포츠 왕국인 미국조차 팬의 고령화로 골머리를 앓는 실정입니다."

- 온종일 하고 싶지도 않은 일에 치여 스트레스를 안은 채 귀가한 후에 인간관계에 지친 상태에서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드라마를 보기 꺼려진다. TV 드라마에서든 스포츠 프로그램에서든 스트레스 해소 기능이 요구된다. 기분 좋은 장면을 기분 좋게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불쾌하거나 지루한 장면은 건너뛰면서 말이다. 결말까지의 요약 영상이나 줄거리를 읽고 '문제 없음'을 판단한 후에야 본편을 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가성비를 추구하면서도 불쾌한 것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잔혹한 장면이 많은 영화를 미리 필터로 거르는 것도 그러한 예다. 소중한 시간을 기분좋게 보내기 위한 훌륭한 자기방위책이다.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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